001. "글"

by 나무파파

몇 년 전의 나는 독서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힘들었던 수험생활과 취준생 시절 반강제로 접해야만 했던 학습서에 대한 반작용이 그 핑계이다. 그래서 취업 후 20대 시절 읽은 책은 고작 열 권 남짓인 듯하다. 그마저도 문학성이 낮은 대중 소설에 불과하다. 나에게 책과 활자란 반강제적으로 주입되어야 할 정형화된 지식의 일부였을 뿐이었다.


그런 내가 지금은 책을 너무 사랑한다. 다독까지는 아니지만, 근 5년 넘게 매년 적게는 50권에서 많게는 70권까지 독서를 이어 오고 있다.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까지는 아니지만,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나에게 커다란 즐거움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처럼 활자 혐오에서 활자 사랑으로 넘어간 사건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결혼 후 얼마 안 되었을 때이다. 새벽에 문득 잠에서 깨어 화장실에 가는 길에 서재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출근 시간 까지는 아직 한두 시간이 넘게 남았지만, 그곳에는 먼저 일어나 독서를 하는 아내가 있었다. 그 모습은 나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직업적 안정성과 경제적 충만함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개인의 유희를 넘어 발전적인 목적으로 다양한 책을 읽고 있었다.


평소 책을 멀리하던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퇴근 후 남는 시간을 허비하는 것에 불과한 나에게 아내의 모습은 큰 울림이었다. 그런 아내를 따라 남는 시간에 책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 권을 읽기가 무척 어려웠다. 책에 펼쳐진 활자의 나열이 나의 뇌를 어지럽히는 벌레만 같았다. 자극적 영상 콘텐츠에 익숙해진 나의 뇌는 흑백의 단조롭지만 내용적으로 복잡한 활자의 구성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래도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읽기 시작한 것이 벌써 수년이 지났다. 타의적으로 시작한 독서에도 불구하고, 나는 독서가 주는 충만감에 매료되었다.


독서란 것은 참 매력이 있다. 읽다 보면 저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나만의 길로 빠지게 된다. 마치 모두가 오르는 등산로를 벗어나 새로운 경로를 발견하는 기분이랄까. 현실에서는 안전 때문에 이러한 이탈은 제한되지만, 내 머릿속에서 이뤄지는 공상은 자제할 이유가 없다. 글을 자양분 삼아 생명의 나무의 가지처럼 무한히 뻗어나가는 나만의 생각은 지적열망에 대한 충만과 더불어 바쁘고 치열한 삶을 벗어나 한가로운 여유를 만끽하게 한다. 이러한 매력에 빠져 향긋한 커피와 잔잔한 음악과 함께 사색에 잠겨 독서하는 것이 하나의 취미가 되었다.


머리가 나빠서 독서 후 얻은 정보와 생각들이 가벼이 휘발되는 게 너무 안타까웠다. 그래서 책을 읽고 서평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학창 시절 숙제인 독후감을 쓰는 기분이었다. 날아가는 기억의 끝자락을 붙잡고 늘어지는 모습이 처량했다. 그저 책을 요약하는 것에 급급했다. 그러나 이것도 글쓰기의 발달 과정일까? 어느 순간 내 감상도 적기 시작했고, 이전에 읽었던 책의 내용을 인용하고 조합하며 내 생각을 확장해 보게 되었다. 그렇게 글을 읽는 것을 넘어 글을 쓰는 행위까지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작성한 서평은 아내에게만 보여줬는데, 아내가 브런치라는 앱을 소개해 주며 올려보면 어떻겠냐고 알려주었다. 내가 글을 쓰는 사람도 아니고 잘 쓴 글도 아닌데 공개된 장소에 올린다는 것이 무척 부끄럽기에 망설였다. 그렇지만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공개된 곳에 올리다 보면 글을 쓸 때 조금 더 신경 쓰고 잘 쓰려고 노력하지 않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그러한 과정에서 내 취미인 독서와 글쓰기도 한 단계 발전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브런치를 시작하였고, 지금은 서평이라는 제목으로 매주 글을 올려보고 있다.


서평이 내 생각이 주를 이뤄 작성하긴 하지만, 이러한 내 생각은 저자의 의도에서 시작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명소로 여행을 떠나고 싶은데 누군가 소개해 준 곳만 가보는 느낌이랄까. 글쓰기에 나의 주체성을 더해보고 싶어 새로운 연재 브런치 북을 만들어 보았다. 내 생활 속에 문득 떠오른 단어로부터 시작되는 글을 써보는 것이다. 특정 단어로 시작되는 마인드 맵의 작문화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인간 뇌의 기억법은 컴퓨터의 데이터 저장법과 달리 분류적이고 체계적이지 못하다. 뉴런과 시냅스로 연결, 전달되는 뇌의 정보 저장 방법은 무작위적 연계성을 띤다. 그렇기에 인간의 기억은 파편적이고 비선형적인 형태이다. 드라마 속 배우의 이름이 기억나질 않다가 얼마 뒤 생뚱맞은 노래를 듣다 그의 이름이 문득 떠오른 경험이 있다. 컴퓨터의 카테고리화된 정보는 필요할 때마다 찾고 꺼내 쓰기 편리하지만 그렇지 못한 인간의 기억 체계는 다소 비효율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기억법은 인간의 창발적 사고의 시작이라 볼 수 있다. 파편적인 정보의 무작위적 결합이 전례 없던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소프트 뱅크의 창업자 손정의는 빈카드에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를 적어 넣은 수백 장의 카드를 무작위로 조합하여 사업 아이템 구상하였다고 한다.


앞서 비효율적이지 않을까 의심을 했던 뇌의 구조는 사실 정보의 저장에 있어 효율적이다. 예를 들어 '바나나'라는 단어를 저장한다고 해보자. 컴퓨터 식의 카테고리화된 저장 법은 '바나나'를 노란색 물체 폴더뿐만 아니라, 과일 폴더에도 저장해야 한다. 거기에 원숭이 폴더에도 저장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뇌는 수많은 뉴런이 비선형적으로 연결되어 '바나나'는 '노란색'과 '과일', '기차', '원숭이'와도 자유롭게 연결된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 오세아니아 정부가 유사 단어를 삭제하며 간결한 '새말 사전'을 편찬한 것은 인간의 창의성을 말살하여 한껏 단순화된 그들에 대한 통제를 수월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인간의 창발적 기능을 촉진하는 뇌의 기제를 적극 이용하여 나만의 생각을 무한히 넓혀보고 싶다. 그래서 문득 떠오른 하나의 단어로 시작되는 마인드맵을 작문해보려 한다. 그 시작의 단어가 '글'이다. 글이 나에게 새로운 취미를 선사하고 그 덕에 나의 소중한 시간을 살뜰히 채워갈 수 있게 만들어 주었기에 이 단어를 정해보았다.


육아와 일의 병행으로 바쁘고 정신없는 매일이지만 나와 아내는 한 가지 목표를 꿈꾼다. 은퇴 후 전망 좋은 곳에 작은 북카페를 여는 것이 그 꿈이다. 그곳에서 커피를 내리며 한가로운 여유와 함께 독서도 하고 글도 써보고 싶다. 아직까지 좋아하는 마음에 비해 커피 내리는 실력도, 작문 실력도 미천하다. 그래도 은퇴까지 꽤 많은 시간이 남았기에 아이가 크면 커피도 배우고, 많은 작문을 시도해보려 한다. 브런치의 새로운 연재북은 내 꿈을 위한 과정의 일환이다. 이러한 노력들이 은퇴 후 목표를 한갓 몽상에 그치지 않게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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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