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 "짬짜면"

by 나무파파

“짜장면 먹을래 짬뽕 먹을래?”


밥 하기 귀찮아 켠 배달어플에 중국집 메뉴를 보며 아내가 묻는다.


“난 짜장… 아니 짬뽕… 아.. 미안, 짜장면으로 해줘”


이지선다의 간단한 질문이지만 짜장과 짬뽕 사이의 선택은 과장을 조금 보태면 인생의 기로에서 고뇌하던 햄릿의 기분을 잠시나마 느끼게 해 준다. 짜장의 기름진 맛과 짬뽕의 얼큰한 맛만큼 장단점이 극명한 메뉴도 없다. 그렇기에 우리나라 중국집에 두 메뉴가 등재된 이래로 짜장과 짬뽕 사이의 고민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답을 찾았다. 늘 그랬듯이. 짬짜면이라는 혁신은 고뇌 속에 고통받는 민중을 구원하였다. 일반적인 크기인 그릇의 가운데 가림막을 두어 짜장과 짬뽕을 모두 담을 수 있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엄청난 돌풍을 일으키며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며 제3의 선택지가 되어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짜장이냐 짬뽕이냐에 대한 답은 찾았지만, 아직 선택의 갈림길은 많다. 부먹이냐 찍먹이냐, 콩국수에는 설탕이냐 소금이냐, 민초냐 아니냐 등등 수많은 갈림길이 우리 앞에 존재한다. 다만 민초를 싫어하는 내가 민초파를 혐오하거나 배척하지 않는다. 그냥 특이한(?) 취향이라 생각할 뿐… (민초파인 분들의 취향은 존중하지만 나는 민트초코는 정말 무슨 맛으로 먹는지 모르겠다.) 이런 선호에 대한 대립 구도는 하나의 밈과 같아서 이를 두고 다투는 이들의 주장은 가벼운 유머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정치의 영역으로 들어오면 분위기가 바뀐다. 좌-우, 여-야, 진보-보수 등 정치권도 앞선 음식들의 논쟁처럼 이분법적인 대립구도를 형성하지만 그 대결의 양상은 완전히 다르다. 음식의 논쟁이 선호의 차이였다면, 정치 영역의 논쟁은 점점 옳고 그름을 다투는 당위성의 문제로 변질되고 있다. 특히 SNS나 유튜브처럼 알고리즘에 따라 콘텐츠가 노출되는 미디어에 익숙한 시대에는 확증편향이 강화되어 갈등이 더욱 첨예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정치 논쟁은 왜 이렇게 배타적으로 흐를까? 이는 한정된 사회 자원을 분배하는 문제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짜장과 짬뽕의 선택에서 상대의 선택은 나의 편익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정치적 선택에 있어 나와 다른 정당을 지지하는 이의 결정은, 나의 이익을 대변해 줄 것으로 기대되는 정치인의 당선 가능성을 낮춘다. 이로 인해 한정된 정부예산의 분배에서 내 몫이 줄어들지 모른다. 그렇게 정치적 선호가 제로섬 게임이 되는 순간, 사회 갈등은 피할 수 없게 된다.


물론 갈등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서로 상반된 사상은 정(테제) + 반(안티테제) = 합(진테제)의 과정으로 갈등과 반목을 딛고 일어나 사회 발전을 이끌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도식의 전제는 마찰 속에서도 상대의 견해를 수용하고 조정할 여지가 있을 때 만 가능하다. 그러나 요즘의 갈등 양상은 너무 과격하다. 상대의 의견에 귀를 닫고 자신의 입장만 옳다고 부르짖는 두 영역의 외침은 서로에게 닿지 못한 채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사라져 버린다.


계속해서 날카로워지기만 하는 갈등의 양상 속에, 서로 간의 조화와 포용력을 강조하는 중용의 미가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고 있다. 인간의 생존 본능은 나와 다른 이, 즉 외집단에 대한 배척 정신이 뿌리 박혀 있다. 이와 반대로 내가 속한 공동체의 구성원에게는 포용적인 모습을 보인다. 기술의 발달로 인종과 국경을 넘어 전 세계가 지구촌화 되며 인간의 내집단이 확대되는 듯했으나, 최근 들어 퍼지는 국가 간의 자국우선주의, 민족주의와 더불어 개인 간에 성향에 따라 공동체가 ‘나노사회’로 파편화되며 빠른 속도로 내집단이 축소되고 있다. 그렇다면 내집단을장하고 포용력을 견지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구체적으로 무엇이 있을까?


모두를 위한 공동의 목표를 설정하는 게 한 방법일 수 있다. 기후변화 대응 등 정치, 지역의 문제를 초월하여 인류 공동의 번영을 위한 목표를 설정하는 게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과거 겨울을 대비하며 김장했던 가족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수많은 가족 구성원이 모여 김치라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열정은 얼마나 통일되었던가.


또 다른 방법으로는 다양한 페르소나를 갖추는 것이다. 나라는 사람의 특성은 하나의 관점으로 정립할 수 없다. 나는 한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하고 해외축구를 좋아하는 아저씨이기도 하며, 소주와 맥주를 좋아하는 애주가이기도 하다. 이러한 나의 다층적인 정체성은 육아 중인 부모와 동질감을, 같은 구단을 응원하는 사람과는 동료애를, 그리고 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친밀함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다차원적 정체성은 내집단의 확장을 이끌어준다.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방법은 언어 프레임의 전환이다. 사피어-워프의 가설에 따르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우리의 인식과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갈등을 중재할 완충지대가 확대되어야 함에도, 중립적 사고를 지닌 이들에게 박쥐, 회색분자, 줏대 없는 인간 등등 경멸적 표현을 서슴지 않는다. 이들을 긍정적인 느낌의 별칭으로 부르면 어떨까? 이와 관련하여 얼마 전 읽었던 에세이의 한 문장이 떠올랐다.


“소나무처럼 일관된 사람이고 싶으나 나는 강아지풀로 태어났나 보다.” <바르셀로나의 골목에서 어슬렁거리면 얼마나 좋을까> 중


우유부단하고 단호한 선택에 어려움을 겪는 저자의 자조 섞인 표현이었지만, 강아지풀이라는 표현이 너무 맘에 들었다. 누구나 어렸을 적 시골길의 강아지풀을 꺾어 간질이며 놀아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부드럽고 말랑한 물성의 이것은 어린 시절의 추억과 맞닿아있는 긍정적인 느낌을 선사한다.


그래서 나는 회색분자나 박쥐 대신, 긍정적인 의미를 담은 ‘강아지풀’을 떠올려보았다. 대쪽 같은 성품으로 다른 의견을 수용할 바에야 부러지는 사람보다 강아지풀처럼 타인의 견해를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 아니면 짬짜면은 어떨까. 상반된 주장을 모두 수용해 새로운 창의적인 답을 낼 수 있는 사람. 양쪽 다 지금 시대에 꼭 필요한 사람이다.


어느 때보다 사회 갈등이 심화되며 서로에 대한 시선이 날카로워지고 있는 요즘이다. 극단으로 치닫는 다툼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 사회에 짬짜면과 강아지풀이 많아지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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