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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Inner Life 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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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i et Moi Oct 24. 2020

삶에서 당신의 가면은 무엇인가요?

페르소나

  인간이라면 한 겹 혹은 여러 겹의 가면을 쓰며 살아간다.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복장이나 화장처럼, 우리는 가면을 그렇게 한 겹씩은 감싸매고 세상과 만난다. 홀로 고립되어 살 것이 아니라면 지극히 그렇게 된다. 게다가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모르는 사람을 포함해서, 가족처럼 가까운 몇 빼고는 대놓고 민낯을 보여주기에는 거시기하고, 사실 그럴 필요도 없다. 가뜩이나 갑갑했던 마스크조차 피부처럼 찰지게 붙는 마당에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필수 불가결한 필수품 같은 거다.


  가면에서 유래한 말이 페르소나다. 페르소나는 심리학자 융이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내외부와 소통하는 자아 위에 덧입히는 모종의 역할 혹은 규범 마땅히 보여야 하는 혹은 취하게 되는 모습이다. 그만큼이나 타인을 의식하며 생성되는 행동이자, 보여야 하는 혹은 보이고 싶은 모습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게 바로 사회화 과정 아니겠나? 사회에서 요구하는 바람직한 규범과 가치를 익히는 것이자, 보여주고 싶고, 비치고 싶어 하는 어떤 바람 혹은 욕구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가면을 쓰네 마네, 썼네 마네? 뭐가 중요하고? 뭐가 문제가 될까?


  문제는 페르소나 자체가 아니다. 지극히 자연스러우니까. 그럼에도 페르소나에서 파생한 본질적 문제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가면이 자신의 얼굴, 민낯이라고 착각하는 경우다. 자신은 구두쇠가 아닌 절약가 일뿐이라고 믿는 스크루지나, 실상은 무능하나 백성에게 존경받고 인정받고 싶었을 뿐인 벌거벗은 임금님 같은 경우다. 두 번 째는 가면을 벗었더니 자신의 얼굴이 없는 경우이다. 가오나시 같은 상황이다. 슬프게도 타인에게 지극히 이해받지 못하고 참 희한하거나 이상하게 비칠 수 있는 경우이다.


  나라고 착각하는 첫 번째 경우는 사실 자신은 별로 괴롭지 않다. 괴롭더라도 애매모호하거나 남 탓을 쉽게 할 뿐이다. 최악의 상황이 펼쳐진다 해도 주변 사람이 곡할 노릇이고 괴롭다. 혹은 그 착각이 우스울수록 도마 위에 자주 올라가거나, 벌거벗은 임금님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고 할 수 있다. 타인의 눈에는 훤히 보이는 데 정작 본인만 모른 채 진심으로 가면을 포장하기 바쁘니, 타인에게도 쉽사리 간파당하기도 하고, 사람 잘못 만나면 인생이 슬슬 꼬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착각도 자기의 자유다. 이러한 꼬임 정도야 삶에 대한 책임, 본인의 몫으로 남겨둘 수 있고, 주변의 따뜻함으로 기적적으로 전환될 수도 있고, 무엇보다 자기를 찾는 여정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


  맘이 아픈 건 두 번째 경우다. 갑갑해서 가면을 벗었더니 주변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 물론 천차만별의 반응이 나올 수 있겠지만, 미치겠는 건 가장 가까운 중요한 인물에게 조차도 달갑지 않게 받아들여지는 거다. 가오나시 같은 상황이므로 가까운 주변은 너무 뜨악스럽고 경악하며 달갑지 않을 수 있다. 가면을 사랑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정말 미친 듯이 괴로운 것 당사자다. 이러한 영화 한 편을 소개한다.


"행복한 척하는 게 미친 짓이다."


  영화 비버 주인공 월터 블랙은 거짓된 가면(페르소나)을 보여주는 삶에 지쳐 극심한 우울을 겪게 된다. 역할놀이, 가면 놀이를 끝내고, 가면을 벗었더니 모두가 싫어한다. 심지어 모두가 가면 쓴 모습을 원한다고 느낀다. 그렇다고 도로 다시 쓸 수 없는 가면이다. 그럼에도 가까운 모든 사람들은 가면을 쓰고 이전처럼 행복한 척하는 미친 짓을 바란다면 어떨까? 월터의 우울을 더 가속화하고 지속시킬 뿐이다. 그저 대책 없이 우울하고 침울한 기분만이 남아 허우적거릴 뿐이다. 설상가상으로 엎친데 덮친 격으로, 정작 벗어던진 가면 뒤로 있어야 할 자신의 얼굴도 찾지 못한다. 가면을 벗은 내가 누구인지 도무지 알지 못하니... 주변에게는 더욱 이상하게 비친다. 월터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알아볼 수 없는 자신을 찾을 수 있을까? 적어도 가면을 벗어버릴 용기는 가지지 않았나!


  아이러니하게도 월터 마음의 어려움을 더욱 가중시키는 건 가족이다. 물론 가족은 월터의 회복을 바라지만, 그 바람은 과거의 월터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일 뿐이다. 한때 잘 나갔으나 과거의 월터는 더 이상 월터일 수 없음에도... 이를 알려고 들지 않으니, 이해할 수 없는 이해하고 싶지 않은 아빠, 남편이 되어버린다. 멋진 아빠, 성공한 남편만을 바라고 기대하고 있으니 바람직한 역할로만 존재할 뿐, 그 어디에도 월터 자신은 없다. 잔인하고 가혹한 현실이다. 그나마 영화이기에 적나라하게 진실을 말할 수 있다. 월터는 아버지로, 남편으로, 기업가로 기능하지 못하는 효용가치 떨어진 사람이고, 결국 가족에게 거짓과 위선으로 회복될 거라고 기대하는 처지에 놓인 거다. 이러니 벼랑 끝에 몰린 월터는 이러한 상황에서 도무지 나아질 이유도 없다. 게다가 깊은 마음의 구렁텅이에서 어떻게 혼자서 기어서라도 올라올 수 있겠나? 애써 나아지고자 했던 노력이 애씀이 소용없고 회복될 수 없는 이유이다. 그래서일까? 비버는 그냥 이대로 삶을 하직하려는 자살 충동을 실행한다. 다행히 기적처럼 죽다 살아났고 운명처럼 인형 비버가 말을 걸어온다. 그렇게 월터 블랙은 비버와 대화를 시작한다. 이는 인형 비버를 매개로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가면 속 진정한 자기와 조우하게 된 것이다.


여러분은 깊은 속내를 툭 털어놓을 비버가 있나요?


  21세기는 초연결 시대이다. 시공간을 초월해 연결될 수 있으나 아이러니한 건 서로 간의 마음의 거리는 더 멀어졌는데, 언제든지 연락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연락하고 싶지 않은 인간들까지 버젓이 드러나니... 껄끄럽다는 호소가 나올 정도다. 손쉽게 몇 자 두드리면, 관심대상이든 아니든 그들의 삶쯤이야 얼마든지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설사 삶의 단편, 부분들이, 과장된 연출이고, 편집된 이미지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러니 더 페르소나, 가면이란 단어가 주목받는지도 모르겠다.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누군가의 삶을 봐야만 어떤 가면을 써야 할지 고를 수 있게 되니까 말이다.


  이토록 현대인이 마땅히 가져야 할 기준과 이미지들이 범람하고 분출되니 삐끗하면 현대인들은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나로 꾸역꾸역 살아가가나, 가면이 자신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다가, 보여주고 싶은 환경이나 상황을 연출하며 자아를 부스팅 하다가, 현타 맞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 스펙 등으로 자신을 옭아매다가 감당선을 넘어서면 힘겨움이 닥쳐다.  그럼에도 도무지 힘들고 나약한 면을 내보이지 못해서, 여전히 남들에게 보이고 싶은 이미지만 더욱 나열하니... 속은 어떻게 뭉그러지고 있는지도 자각하지 못한 채, 아픔은 더 꽁꽁 싸매고... 그래서 더 많은 가면을 만들기도 하고, 더욱 자기 설정에 속아 넘어가고 공고화하기도 한다. 그래서 또 자신의 정체를 모른 채 살아간다.


  그러나 누구나 고유의 가치와 색깔은 있을 수밖에 없다. 아직 확립, 정립,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잃어버렸다면 찾으면 될 일이고, 흐트러져 엉켜있다면 정리하면 될 일이다. 예를 들어 설리 님의 고블린이라는 곡은 최진리라는 한 개인과 가수, 배우, 연예인이라는 고충까지 더해져 이에 대한 복잡한 정체성을 이야기했던 것으로 느껴진다. 어린 나이에 가면에 쓰고 살았던 자신에 대한 고백과 아픔을 노래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사를 하고 싶었던 것뿐이야.."라는 마디의 가사를 곱씹어 보면,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미소의 이유, 그 마음이 들리기에 더 마음이 아프다.


   혹시 가면 속에서 충돌하고 분열하는 자신을 보며 도대체 자신이 누구인지 혼란스러운가? 영혼을 가진 인간이기에 너무나도 아프지만 자연스러운 일이다. 기계인 로봇이 아니라, 영혼을 지닌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누구나 정체를 모를 수도 있다. 가오나시같이 느껴져도, 결국 누구나 원한다면 정체를 찾을 수 있다. 또한, 아무리 상반되고 다양한 너무나도 많은 나가 있어 혼동되고 혼란스럽거나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서.." -가시나무/ 조성모


  행여나 자신 속에 여러 가지의 모습에서 어려움을 느낀다면, 그만큼 잠재력과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분열된, 혹은 가면의 여러 명의 나를 죽이거나 살리는 문제로 받아들여지지만, 죽이느냐 살리느냐 사이에 끼인 딜레마는 영영 풀 수 없는 문제가 아니다. 이중적 혹은 다중적이고 모순적인 자아를 지녔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여러 색을 지닌 사람이다. 여러 색이 혼합되어 하나로 통합하는 길로 들어설 수 있다는 신호이다. 이러한 생의 딜레마를 풀고 나면, 가히 대체 불가능한 사람으로 폭발적 성장이 일어난다. 이를 그림자를 인식하는 과정이라고도 부연할 수 있겠다.


  결국, 자기와 관계를 상실한 페르소나가 맘을 아프게 다. 그러므로 어떠한 양극의 '나'라도, 가오나시라도 괜찮다. 이를 이해해 주고 받아들여주는 과정이 필요할 뿐이다. 진정한 자기를 만나, 영혼의 아픔을 달래주는 것은 자신의 삶에 책임이자, 행복을 향한 첫걸음 것이다. 그렇게 자신에게 깊이 뿌리내릴 수 있다면, 닥쳐올 거절이나 두려움이야 얼마든지 단단하게 맞닥뜨려 헤쳐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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