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각 천 만원씩 추려두고서 여행 배낭과 각종 자잘한 여행물품들을 사재 꼈다. 역시 쇼핑은 재미있다. 그리고 슬슬 윤곽이 드러나는 여행경로를 따라 도시와 숙소, 관광지들을 정리해나갔다. 가뜩이나 사직서를 내놓고 뜬 마음이었지만 일하는 틈틈이 여행 계획을 짜자니 마음은 이미 산을 건너고 바다를 넘고 있었다.
몇 번을 재촉해 물어봐도 이렇다 할 의견이 없는 알파카 씨를 대신해 가고 싶은 곳들을 엑셀로 정리하며 가장 중요한 첫 행선지를 생각했다. 여러 가고픈 곳들 중에 절대 뺄 수 없는 곳, 이미 다녀왔지만 두 사람이서 경험할 미래가 전혀 예상되지 않는 곳. 바로 인도다.
인도라는 나라만큼 개개인마다 호불호가 강하고 말 한마디 안 보태는 사람이 없을 지경인 곳이 있으랴. 다녀온 사람은 침묵을 택하고 다녀오지 않은 사람은 사람이 도저히 살 수 없는 곳으로 묘사되는 그곳은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낯선 얼굴을 한 곳이었다.
나는 스물네다섯 무렵 인도에 다녀왔다. 학교에서 진행하던 개발도상국 지원금 사업에 친구들과 시도하고선 똑 떨어져 홧김에 우리 돈으로 가자! 하며 떠나버렸던 여행이었다. 여자 셋, 남자 하나로 이루어진 파티였고 그 무섭고 더럽고 시끄럽다는 곳에서 누구도 아프지 않고, 나쁜 일 당하지 않고, 심지어 기차 시간 한 번 어긋나지 않은 채로 일정을 마친 경험이 있었다. 그곳이 그런 성공적인 여행을 하기에 그리 협조적인 나라는 아니었지만 여느 해외지 만큼 상식적인 태도와 꼼꼼함 등을 잘 갖추고 다닌다면 상식 밖의 일이 폭탄처럼 터지는 이상한 곳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어느 사람들이 말하듯이 득도와 영적인 깨달음이 단숨에 나를 찾아오는 그런 신비로운 곳도 분명 아니었다. 다만 도시에서 나고 자라 퍼스널 스페이스를 기본으로 사람과의 사이에는 지켜야 할 예의와 범절이 있고 행동거지는 교양이 있어야 한다는 삶의 가치관에 반짝-하고 새로운 영역이 열린 것은 사실이었다. 내가 이전에 만난 어느 곳보다 가장 낯설고 원시적인 환경은 나를 순식간에 무장해제시키고 품 안에 종이와 플라스틱 쪼가리를 믿고 우쭐거리고 있는 한 인간을 직시하게 했다. 수많은 다른 동물들 사이에서 하나의 나라는 동물이 무엇이 그렇게 잘나고 다른지 어느새 잃어버리게 되고 남는 것은 겸허함 뿐이었다.
이렇듯 나의 성격과 가치관에 영향을 준 여행지이다 보니 반드시 비슷한 경험을 하리라는 보장이 없더라도 나의 배우자와 그 낯선 문화에 몸을 부딪혀보고 싶은 마음이 들끓었다. 특히 앞으로 살아나가며 나이 듦과 안정, 성공과 같은 주제들이 우리 몸을 스치고 지나갈 때 겸손함과 인간성이라는 중심을 잡아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의 이런 깊은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행선지를 듣고 기겁하던 알파카 씨는 몇 달에 걸친 은근한 세뇌 끝에 체념하고 인도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끊어왔다. 이제 출발만 남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