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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재형 Feb 27. 2019

'글' - 「만년필의 죽음」

글을 쓰고 싶었던 회사원은 만년필을 샀다

  우리는 회사원이다. 많은 회사원들은 글쓰기가 일이다. 기획안을 만들고 기안서를 올리고 하늘 어디께 자리하신 클라이언트에게 메일을 보내는 것, 모두가 글쓰기다. 비록 육하원칙과 두괄식 서술이 강제되는 손발이 자유롭지 못한 글쓰기이지만, 아무렴 어떠랴. 글쓰기를 업으로 여기며 막연한 이직을 꿈꾸는 우리에겐 이것도 감지덕지다.

  

  때로는 계약서에 적힌 업무 범위를 살짝 벗어나는 작은 일탈을 감행하기도 한다. 기깔나는 비유 하나쯤 기획안 장표 깊숙한 곳에 슬쩍 숨겨놓아도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어디의 누구입니다.라고 시작하는 메일을 한 번쯤은 '선선하던 바람이 어느새 창백한 표정으로 서늘하게 부는 아침......'이라고 시작해도 클라이언트가 역정을 내진 않을 것이다.(아마도)

 

  그렇지만 우리는 회사에서의 글쓰기에 항상 부족함을 느끼고 기어이 퇴근을 하고서도 글쓰기에 나서고 만다. 누군가는 소설을 쓸 것이고 누구는 일기를 쓸 것이며 누구는 설레는 마음을 가득 담아 사직서를 쓸 테다.

  

  만년필을 산 것은 17인치 모니터에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었던 마음속의 글을 힘껏 쓰기 위해서였다.




  만년필의 죽음


  만년필이 부서진 것은 며칠 전의 일이었다. 몸통이 하얀 라미 사파리. 언제, 누구에게서 받은 것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확실히 내가 산 것은 아니었던 하얀색 만년필은 몸통에 길게 금이 간 채로 깨어졌다. 잉크 카트리지를 갈기 위해 몸통을 돌려 빼던 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갑자기 발생한 사고. 소리 없는 죽음이었고 죽고 난 뒤에도 적막만이 감돌았다.

  

  플라스틱 몸통은 생각보다 훨씬 연약했다. 영원불멸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쉽게 깨어질 줄도 몰랐다. 아주 가늘고 길게 금이 간 몸통은 쩍 소리와 함께 연약한 속살을 드러내며 좌우로 벌어졌다. 글을 쓰던 중이어서 벌어진 몸통을 임의로 봉합도 해 보았으나 소용없었다. 만년필의 사후에도 요단강이 있다면 이미 급행으로 건너가 버린 듯, 숨이 완전히 멎어 있었다. 죽음은 아무런 전조도 없이 찾아와서 덤덤하게 현실만을 드러낼 뿐. 죽음엔 의미가 없었고 찾을 수 있는 교훈도 없었다.

  


  하얀색 노트에는 아무래도 하얀색 펜이 어울릴 것 같았다. 모나미와 샤프펜슬을 거쳐서 하얀색 라미 만년필에 눈이 닿았다. 끝이 칼날처럼 날카로운 펜 닙은 여태껏 만나 본 적 없는 모양이어서 계속 들여다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잉크가 무방비하게 새어 나오는 촉을 종이 위에 뭉개 가며 쓴다는 원시성이 마음에 쏙 들었다.

 

  쓰기 위해서는 세워서는 안되고 항상 눕혀야 하고 그러면서도 항상 같은 방향으로 눕혀야 쓸 수 있고 동시에 같은 힘으로만 눌러야 글이 나오는 제약이, 나는 좋았다. 물리적인 제약의 반동으로 글에 대한 정신적 감응이 조금이라도 쉬워지기를, 나는 기대했다.


  

  손에 익었던 만년필이 먼 길을 가고 나는 꽤 오랫동안 아무것도 쓸 수 없었다. 일할 때 쓰는 수성 볼펜으로는 글의 시작조차 열기 힘들었다. 샤프펜슬은 언제든 지울 수 있다는 가능성이 매력적이었지만 바로 그 가능성 때문에 너무 가벼웠다. 가볍게 쓰이는 글은 오래 머물지 못하고 금세 지워져버렸다. 아날로그의 극치, 연필도 잡아 보았지만 만년필을 능가하는 원시성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머리로 쓰는 줄 알았던 글은 사실 손으로 쓰는 것이었는데 이 사실 앞에서 나는 마냥 어리둥절했다. 글의 주체가 나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손과 손에 들린 만년필이었음을, 만년필이 떠나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인연은 부재 속에서 존재를 드러내고

  사랑은 상실 한 후에 의미를 가진다.



  결국 나는 새 만년필을 샀다. 새로운 만년필은 조명에 따라 노랑과 초록을 넘나드는 알루미늄 몸통을 가지고 있었다. 늘씬하고 단단한 알루미늄 몸통이 좋아서 연신 매만지고 놀았다. 이 몸이라면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예고와 전조도 없이 나를 떠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아직은 내 손과 만년필이 서로 어색해 하며 내외하지만, 곧 화목해지리라.


  그렇게 이 데면데면한 만년필로 브런치의 시작을 열었다.

  


  "오래오래 함께 하자." 나지막이 속삭인 목소리를 몸통이 하얀 만년필은 여전히 기억했다.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만년필은 의심하지 않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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