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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재형 Mar 02. 2019

'불금' - 「불금의 폐허에 어서 오세요」

약속이 파토나버린 황량한 불금에 회사원은 카페로 갔다

  누가 부르기 시작했는지는 몰라도 불금이라는 이름은 정말 잘 지은 것 같다. 금요일인 것만도 훌륭한데 불탄단다. '불타는'이라는 수식어에 담긴 은유에 20대의 나는 정말 후끈하게 몸이 달아오르곤 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술로 적셔놓고도 해가 뜨기 전까진 아무도 못 일어난다며 엄포를 놓던 시절이 있었다. 해 뜰 때까지 마시자고 약속하곤 술집 벽에 직접 해를 그려놓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무용담도 드물지 않던 시절.

  

  천지를 불 싸지를 것만 같았던 청춘의 열정이 이제 잔잔한 모닥불이 되었을지언정 불금은 여전히 설레는 단어다. 금요일 오후 5시, 사무실의 전 직원이 시계만을 뚫어져라 보며 엉덩이가 무거운 시계 침에 응원의 텔레파시를 보낸다. 힘내! 얼른 움직여. 금요일 밤은 짧단 말이야!

 

  그러다 갑자기 있었던 약속이 파투가 나면, 모든 것이 무너져내린다. 주황색 불빛으로 은근하게 타오르던 마음속 모닥불엔 찬물이 끼얹어지고 다 타고 식어버린 숯처럼 잿빛의 금요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언제나 축제와 같던 퇴근길도 왠지 다리가 무겁고 어깨도 천근만근이다. 오늘은 금요일, 주말이라는 확정된 행복만으로도 즐거운 불금인데.

  

  헛헛한 마음을 달래러 카페에 들어갔고 그곳엔 갈피를 잃어버린 애달픈 영혼들이 저마다의 방법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불금의 폐허에 어서 오세요


  금요일. 약속이 파투 나고 홀로 버려진 금요일의 밤. 사람들로 가득 찬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서 책을 읽었다. 내용이 눈에 제대로 들어올 리가 없다. 이토록 사람이 많은 카페, 불타는 금요일의 카페, 파투 난 약속으로 오갈 데 없어진 몸은 발 디딜 틈 없는 카페 안이 그저 황량하게 느껴졌다. 폐허로 불어 드는 스산한 바람이 커피 잔을 스친다.

  

  책은 덮어두자. 들어오지 않는 활자에서 눈을 떼고 카페 속 사람들에게 눈을 돌렸다. 금요일 밤, 나와 함께 남겨진 폐허 속 생존자들.

  


  한 여자가 있다. 귀밑으로 떨어지는 단발 머리에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짙은 네이비 색의 짧은 스트라이프 원피스를 입었다. 남들보다 훌쩍 빠르게 봄을 맞이한 차림새다. 휘핑크림을 가득 올린 정체불명의 초록색 음료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지만 그녀는 손도 대지 않는다. 흘깃흘깃 음료를 보며 한쪽 눈썹을 불만스럽게 치켜올리는 것을 보니 저런 것을 시킨 자신을 원망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기차는 떠났고 그녀의 손엔 불길한 녹 색깔의 음료만 남았다.

  

  음료로 다시는 눈길을 던지지 않으리라. 마음속으로 다짐한 그녀는 턱에 손을 괴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들릴 듯 말 듯 얕은 한숨을 조용히 내쉬는 모습에 그녀도 이 황량한 불금에 버려진 동지임을 확신했다.

  


  머리가 희끗희끗하게 샌 노신사는 불금의 밤을 배회하는 사람들 사이가 편한 모양이었다. 콧대 중간까지 느슨하게 내려쓴 안경 너머로 손에 든 책을 아주 달게 읽는다. 파란색 커버가 씌워진 책의 표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책을 손에 든 폼이 자연스럽다. 카페 안에 흐르는 달고 가벼운 재즈는 책을 읽기에 아주 좋은 배경 음악이었다. 집중해야 할 필요도 귀 기울여야 할 가치도 없는 가벼움이 머릿속과 귀를 편안하게 해주었다.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카페 안을 메운 백색 소음이었다. 젊은이들의 무료하고 따분해 보이는 표정도 그는 즐거웠다. 결국 도달할 장소는 같을 텐데도 젊은이들은 노력하고 다른 방향으로 발버둥 친다. 노력의 결과는 다를지언 정 결말은 모두 같을 것을 모르는 그들의 아둔함이 귀여웠다.

  

  노인이 웃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살짝 소름이 돋았다.

  


  커플은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싸웠다. 코가 닿을 만큼 얼굴을 맞대고 소곤소곤 밀회를 나누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주위에 둘러진 아우라가 달랐다. 몽글몽글하게 떠오르는 핑크색 구름이 아니라 포연처럼 피어오르는 전장의 연기였다. (화장실로 가는 길에 대화의 일부를 들었으니 확실하다)

  

  먼저 남자의 공세. 남자는 떠오르는 단어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무분별하게 집어던졌다. 단어의 크기와 질량에 상관없이 집히는 대로 던지니 제대로 착탄 될 리 만무했다. 작은 것은 여자를 크게 넘어가고 큰 것은 닿지 못하고 문전에 떨어졌다. 남자는 혼자 지치기 시작했다.

  

  반면 여자는 묵묵히 말을 골랐다. 손에 쥐기 적당한 크기를 골라 날카롭게 다듬었다. 미리 작은 단어 몇 개를 던져 착탄 점을 확인한 것은 물론이다. 남자가 최후의 힘을 다해 던진 말이 크게 여자를 지나치자, 여자는 비로소 준비한 말을 던졌다.

  

  휙, 피융, 푹.

  

  깔끔한 스트로크.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이었다. 박수라도 치고 싶을 정도로 매끄러운 공격. 말은 비수처럼 남자를 꿰뚫었다. 싸움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남자는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승리를 확신한 여자는 이제 자못 너그러운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을 관찰하다 보니 어느새 황량하던 카페에 온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무채색의 잿빛 공기에 따뜻한 색깔이 하나씩 스며들고 폐허로 불어 들던 바람도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때 카페 문을 열고 새로운 남자가 들어온다. 포마드를 잔뜩 바르고 곱게 빗어 내린 머리에 깜장 체크무늬 셔츠와 빨간색 멜빵을 옹골차게 찼다. 금요일 밤을 맞은 기쁨으로 남자의 광대엔 홍조가 가득하다.

  

  그래, 불금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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