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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재형 Mar 10. 2019

'잠' - 「불면증, 한밤중에 깬 불상사에 대해」

한밤 중에 깬 회사원은 내일 업무는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회사원에게 잠은 뭘까?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하루의 일과, 다른 누군가에게는 (항상 부족해서 허덕이는) 달콤한 열망일 것이다. 내게는 다음 날을 이어갈 수 있는 연료를 넣는 일이다. 연료를 부족하게 넣으면 다음 날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털털거리며 가다가 멈춰버릴지도 모른다. 과하게 넣으면 어느 정도는 쌩쌩하게 달려나갈 테지만 어딘가 좀 둔하다고 여길 것이다.

  

  뭐가 됐든 연료를 넣는 일은 좀 지루하기 마련이다. 우리에게 잠은 종종 퇴근 후 겨우 맞은 달콤한 여유를 뺏는 시간이다. 드라마도 보고 게임도 하고 밀린 인스타도 정독해야 하는데, 그러다 아뿔싸. 연료를 충분히 넣을 수 있는 시간을 넘겨버리면...... 다음 날은 꼼짝없이 해롱댈 것이다.

  

  낮이 만족스럽지 못할수록 늦게 자려 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하루를 유예해서 조금이라도 만회해보려는 발버둥이란다. 회사원에게는 조금 다를 것이다. 오늘이 가는 것을 늦추고 싶기보단 내일이 오는 것을 미루고 싶다. 코앞까지 바짝 들이댄 내일의 얼굴을 애써 외면해본다. 그러나 알지. 내일의 태양은 어김없이 뜬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연료를 충분히 넣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나는 종종 불면증에 시달렸다. 애가 왜 이리 무기력하냐는 선임의 비아냥을 이때쯤 많이 들었다.




  불면증, 한밤중에 깬 불상사에 대해

  

  한 밤중에 잠에서 깼다. 쉽게 잠든 것도 아니었던 터라 순간 몹시 당황했다. 침착하게 다시 잠들자고 생각했다. 잠의 여운이 얼굴 위에 미세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에 서두른다면 망각의 기차 위에 다시 올라탈 수 있을지도 몰랐다. 눈을 감고 얕은 들숨과 깊은 날숨을 번갈아 쉬어가며 잠들기를 시도했다. 습… 후우… 습… 후우…. 눈두덩 위에 드리워진 잠의 장막을 살며시 걷어올리고 그 속으로 조용히 들어가려 노력했다. 조심조심, 들숨날숨, 기차가 떠나기 전에 장막을 스르르.

  

  그리고 완전히 깼다.  

  


  “썅.” 어둠을 향해 뱉은 욕지기가 벽과 천정에 부딪혀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망각을 향해 발차한 기차가 속절없이 멀어졌다. 꺼진 선풍기를 다시 틀었다. 덥고 습한 공기를 밀어내며 선풍기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잘게 진동하는 선풍기 모터 소리가 방 안을 메운다. 그 밖에는 기척조차 없는 한 밤중이다.

  

  벽에 달린 시계에 힐끗 시선을 던져봤지만 시간은 알 수 없었다. 눈을 지그시 뜨고 어둠 속에 잠긴 시침을 읽어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휴대폰으로 확인하면 되겠지만 망막으로 치고 들어올 액정 불빛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LED 불빛은 곧장 망막을 지나 뇌까지 흔들어 놓을 것이다. 이 약간의 멍한 상태조차 깨어버리면 돌이킬 방법이 없다. 출근 준비 시간을 여유롭게 가지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아침형 인간을 선망하나 그들의 근면한 얼굴을 혐오한다. 자고로 출근은 반쯤 덜 깬 머리로 비틀거리며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이상한 신념. 시간을 확인하는 것을 포기하고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창밖 골목에 서 있는 가로등 불빛이 미세하게 새어 들어왔다. 불빛은 창을 뒤덮은 뽁뽁이에 산란이 되어 흩어졌다.

  


  불면의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아주 오랜만이었다. 어릴 적엔 잠을 쉽게 이루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내일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하면 밤새 잠을 설치면서도 유쾌하기 마련이었다. 내일은 또 어떤 새로운 날이 시작될까. 어떤 기분 좋은 일이 나를 놀라게 해줄까. 빨리 아침을 맞으려는 달음박질과 가슴의 박동소리가 불면의 이유였다.

  

  직장을 다니고 회사원이라는 정체성이 들러붙은 이후로 쉽게 잠들지 못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베개를 베고 눕는 순간 잠들었고 내일을 생각하는 순간 까무러치듯 잠에 빠졌다. 일과 사람으로 고단한 몸은 잠의 무게를 이기지 못했다. 두꺼운 솜 이불에 깔리듯 잠이 들었다. 간혹 불면의 밤이 찾아온다면 내일을 당기기 위함이 아니라 미루어 유예하고 싶은 마음에서 찾아왔다. 지긋지긋하게 똑같은 내일에, 아무런 기대도 호기심도 없는 내일에. 내일 뜨는 태양은 빛깔도 의미도 오늘과 같을 것임을 알기에.

  

  

  어느새 밤이 서서히 베일을 벗고 찬란한 여명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로등이 꺼지고 어둠에 갇혀 있던 창에 파랗게 빛이 번졌다. 젖은 솜과 같은 정적 사이로 새와 아침의 소리가 스며들었다. 다시 아침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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