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로 출근하던 회사원은 문득 길을 잃었다
초보 운전 딱지를 뗀 지 꽤 지난 지금도 여전히 출근할 때엔 지하철을 탄다. 서울의 회사원과 지하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현란한 색깔의 노선도를 따라 각지의 회사원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지하철로 모여든다. 중력이 잡아당기듯 자연스레 푹 숙여진 고개. 슬슬 빠지기 시작한 정수리의 훤한 빛이 안쓰러운 아침이다.
아침 출근길을 명랑하게 시작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무리 사원 복지가 좋고 빵빵한 연봉에 남들이 우러러보는 사원증을 목에 걸더라도 출근길은 즐거우려야 즐거울 수가 없는 여정이다. 심리적 안전거리는 커녕 옆 사람의 콧바람까지 느끼며 힘들게 이어가는 여정. 끝나기만을 학수고대해도 도착하는 곳이 회사라니 아무래도 보람이 없는 여정이다. 혹시 아침마다 회사에 가는 발걸음이 가볍지 않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연락 달라. 당신은 십중팔구 회사의 대표이거나 오늘이 출근 마지막 날인 집 요정 도비일 것이다. 물론 어쩌면 옆 부서 황 대리에게 남몰래 흠모의 정을 품고 있는 로맨티시스트일 수도 있지만.
유난히 피곤하고 졸음이 쏟아지던 날, 지하철에서 나는 길을 잃어버렸다.
나는 지금 내가 어디에 서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길게 이어지는 지하철 통로. 2호선? 7호선? 이 누리끼리한 색깔은 뭐지? 뒤에서 채근하듯 사람이 밀고 앞의 사람은 마지못해 나아가는 한 줄의 인파에 섞여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 건지 계속해서 생각해 보았다. 앞뒤의 사람들을 번갈아 쳐다보아도 답을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 보였다. 순진무구한 눈빛을 한 지친 표정들 사이에서 나는 내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자문해보았다. 질문은 대답 없는 메아리처럼 머릿속을 울렸다. 생각을 하면서 계속 걸었다. 사람들에게는 목적지가 있었지만 걸음은 맹목적이었다.
답을 계속 생각하면서 긴 줄을 따라 꾸물꾸물 올라가고 내려가다 보니 눈앞에 플랫폼이 나타났다. 한 줄의 인파는 여러 개의 무리로 나뉘어 번호가 새겨진 승강장 곳곳으로 분산되었다. 번호마다 두 개의 줄이 일사불란하게 세워졌다. 룰이 이미 몸에 새겨져 있는 듯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몸이 저절로 움직이는 모양이었다. 현대인의 에티켓이라는 이름으로 규율은 서울 시민의 몸에 새겨졌다.
나는 그중 한 줄에 섞인 채 신발 앞 코로 시각 장애인용 안내 바닥을 툭툭 찼다. 앞사람이 잠시 짜증 섞인 눈빛으로 뒤돌아 보았다가 다시 앞을 보았다. 나는 모른 채 하고 계속 툭툭 쳐댔다. 역사 내에 요란하게 벨 소리가 울렸다. 플랫폼 내벽을 울리며 높고 날카로운 소리가 머릿속을 찌르고 들어왔다. 지금 딴 생각 중이라면 정신 차려라. 벨 소리가 종용했다. 뒤따라 아나운서의 낭랑한 목소리가 열차의 목적지를 두 번씩 반복해서 말해주었지만 여전히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스크린 도어가 열리고 열차 문이 열린다. 빽빽이 채워져 있던 무기명의 사람들이 플랫폼으로 쏟아져 나온다. 안의 사람이 먼저 뱉어져야 밖의 사람이 무사히 집어삼켜질 수 있다. 의지에 상관없이 쏟아진 몇몇 사람들은 다시 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용을 썼다. 나는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디에 가는 건지는 알아야겠다고 생각했으나 방법이 없었다. 머뭇거리는 나를 뒤의 사람이 밀어 넣는다. 축축하게 젖은 손이 등 뒤를 꾹 하고 눌러 밀었다. 나는 속절없이 먹힌다. 열차 문이 닫히고 스크린 도어가 닫힌다. 그때 꽉 찬 열차에서 그나마도 타지 못한 탑승 실패자와 열차 문과 스크린 도어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았다.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이제 어디로 가는지도 몰라요.”
맞은편의 사람이 자기 역시 마찬가지라고 빙긋이 웃어주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