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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재형 Mar 29. 2019

'카페' - 「스타벅스에서 자리 잡기」

회사원이 카페를 갔고 그 곳엔 수많은 회사원들이 있었다

  퇴근 후 우리는 곧장 집으로 가기 아깝다는 생각에 불현듯 사로잡힐 때가 있다. 약속이라도 잡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회사원은 친구도 회사원이라 약속을 갑자기 만드는 것이 쉽지 않다. 피곤한 연인은 퇴근하자마자 집으로 돌아갔다. 술 한잔하자고 부하 직원이라도 붙잡았다간 꼰대 소리 듣기 십상이다. 난 아직 그런 소리를 들을 나이는 아닌데.

  

  그럼 갈 곳은 하나. 카페다. 카페처럼 독립적이면서 소속된 느낌을 주는 곳이 또 있을까? 테이블을 하나씩 꿰찬 우리는 영토를 가진 독립 국가처럼 그 안에서 온전히 우리의 시간을 즐긴다. 혼자라고 해서 사연을 궁금해하지도 않고 슬프고 애절한 표정을 짓고 있어도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는다. 회사원은 타인의 무관심 속에서 비로소 편안하게 쉴 수 있다.

  

  동시에 창백한 얼굴, 내일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한 눈빛 등 비슷한 처지의 옆 테이블 회사원들과 일종의 공동체 의식을 향유할 수도 있다. 온몸에 묻은 쓰디쓴 스트레스를 까만 커피 한 모금에 넘겨버리자. 대한민국이 카페 공화국이 된 것은 우리 회사원 덕분이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즐겨 찾는 곳은 스타벅스였다. 세계 최대의 커피 체인점은 동방의 작은 반도에서도 단연 일등으로 우뚝 섰다. 퇴근 후 스타벅스엔 독립 국가들이 수없이 들어서고 아직 테이블을 차지하지 못한 이들의 눈치 싸움이 소리 없이 펼쳐진다.



  

  스타벅스에서 자리 잡기

  

  아주 시끄럽고 소란스러웠다. 한 개의 빈자리도 없이 꽉꽉 들어찬 카페는 모두가 합심하여 빚어내는 백색소음으로 터져나갈 듯 들썩였다. 오늘은 곧장 집으로 들어가서는 안되고 집 근처 카페로 들려야 하는 날이라도 되는 건지, 그것도 가급적이면 스타벅스여야 하는 건지, 자리가 모두 찼는데도 계속해서 사람들이 들어왔다. 혹시나 빈 자리가 있는지 카페 안을 힐끔거리는 눈으로 훑어보는 선발대. 그 뒤로 자리가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면서 꾸역꾸역 들어오는 후발대가 있었다.

  

  아까부터 주문받기에 여념이 없는 점원은 실핀으로 고정해놓은 앞머리가 흘러내려오는데도 어떻게 손을 쓰지 못했다. 입으로 후하고 불어 뒤로 넘겨보지만 임시방편일 뿐, 머리는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사람들은 계속 밀려 들어와서 주문을 하고 남은 자리가 있는지 계속해서 힐끗거렸다. 컵이 바닥을 보일까 봐 나는 마시는 속도를 약간 늦춰야 했다.

  


  자리를 잡지 못하고 덜컥 음료가 나와버린 사람들은 곤욕스러운 표정으로 반납대 근처를 서성거렸다. 줄을 설 때만 해도 있었던 차례와 질서는 이제 모두 사라지고 빈자리를 향한 무한 경쟁만이 그들 앞에 놓여있었다. 검은 모자를 푹 눌러 쓴 젊은 남학생은 언제라도 달려나갈 수 있도록 신발 앞굽에 무게 중심을 실었다. 까만 스키니 진을 입은 가냘픈 다리가 왠지 못 미더웠지만 그는 언제라도 달려갈 태세였다. 크고 빨간 챙이 달린 인상적인 모자를 쓴 한 아주머니는 떠날 기미를 보이는 듯한 테이블 옆으로 다가가 무언의 메시지를 계속해서 눈빛으로 쏘았다. 이미 잔에 얼음밖에 남지 않은 나는 책에 좀 더 집중하는 척 미간에 주름을 지어 보였다. 여기저기서 아쉬움의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때였다. 주문 테이블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위치의 비상구로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비상구 옆 구석 테이블에 앉아있던 커플이 시끄러운 틈을 타 조용히 진행하던 애무를 마치고 슬그머니 일어나고 있었다. 침으로 입술이 번들거리는 남자가 허리를 쭉 펴서 스트레칭을 하더니 여자의 가방을 들어 어깨에 맸다. 입술에 바른 립스틱이 원래의 색보다 한참은 흐려진 여자도 허벅지까지 말려올라가 있던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순 정적이 흘렀다. 비상구까지는 그들의 탐색 영역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미지의 영역에서 돌연 발생한 기회에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춤거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신발 앞굽에 무게 중심을 싣고 있던 애송이는 너무 오래 긴장하고 있던 탓에 그만 무릎이 풀려버렸다. 안타깝게 휘청이는 몸짓을 신호로 사람들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10미터 남짓한 거리, 3초 안에 결정될 승부. 억겁의 기다림 끝에 비로소 발견된 스타벅스의 엘도라도를 향해 그들은 열심히 뛰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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