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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재형 Jun 14. 2019

'외식' - 「빠네는 이대로 괜찮은가」

무신경한 회사원은 빠네 앞에서 위기에 처했다

  애인과 식사를 하면서 메뉴판 가격을 힐끗대지 않는 것은 회사원이 되어서 할 수 있는 시크함이다. 물론 파렴치한 가격표로 카드 명세서를 무겁게 하는 식당도 있지만 일부일 뿐이다. 그리고 까짓 좀 비싸면 어떠랴. 그녀(혹은 그)가 먹고 싶어 하는데. 모름지기 회사원이라면 소비에서 돈 버는 보람을 찾아야 하는 법이다. 그 소비가 사랑하는 이를 위한 것이라면 더욱 좋을 수밖에.

  

  문제는 종종 가격보다 선택에 있다. 메뉴 선택의 풀이 좁은 사람이라면 매번 똑같은 메뉴 선정으로 그녀를 질리게 만들 수 있다. 다양성이 없다면 근면하기라도 해야 할 텐데 메뉴 선정의 과제를 상대방에게만 맡겨둔다면 별안간 그녀 입에서 불호령이 떨어질지도 모른다. 선택이 어려운 것은 좀 이해할 만하다. 포털의 초록색 창에 '맛집'이라고 치기만 하면 수만 개의 맛 집들이 수두룩하게 뜬다. 우리나라에 있는 식당의 수만큼 맛집이 있는데 범람하는 정보 속에서 어리숙한 회사원은 매번 곤경에 처한다.

  

  빠네에 대한 연인의 애정을 눈치채지 못했던 남자는 이날 곤란에 처했다.




  빠네는 이대로 괜찮은가

  

  빠네는 딱딱한 빵의 속을 파서 그릇처럼 만들고 부드러운 크림 파스타를 부어 속을 채우는 음식이다. 간혹 크림 대신 로제 파스타를 넣는 경우도 있다는데, 그런 건 진짜 빠네가 아니라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다. 빠네에도 진짜가 있고 가짜가 있는 건지 (관심도 없고) 알 수가 없지만 그녀의 주장이 워낙 확고하니 그렇다고 해두자. 아무튼 빠네는 빵 그릇에 파스타를 담은 음식이다.

  

  크림 파스타라는 내용물(이랄까, 본질)은 변함이 없으니 식기를 특이하게 빵으로 쓰는 '형태 변화'를 준 음식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 역시 그녀에 의하면 틀린 생각인 모양이다. 빠네의 그릇으로 쓰는 빵 역시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저 먹을 수 있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파스타의 뜨거운 크림이 빵의 내부에 천천히 스며들어 '크림에 침식된 빵'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음식을 창조하는 것이다. 즉, 형태 변화뿐만 아니라 '성질 변화'까지 이루어내는 놀라운 음식인 것입니다, 빠네는.

  


  빠네에 대해 적지 않은 권위를 가진 그녀는 권위의 아우라만큼이나 애정도 크다. 솔직히 그동안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숨겨놓은 성 취향이라도 고백하듯 빠네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고백은 어떤 전조도 없이 너무 갑작스러웠기 때문에 나로선 어떻게 대응하기가 난감하였다.

  

  "그래? 빠네가 그렇게 좋아? 하하 몰랐네. 그나저나 오늘은 원 할머니 보쌈에 갈까?"

  

  대답이 돌아오지 않고 침묵만이 감돌기에 그녀를 돌아봤더니 강아지같이 초롱초롱하던 눈망울이 어느새 뾰족뾰족한 도끼눈이 되어 있었다. 날이 선 눈빛에는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빠네가 아른아른 드리워져 있었다. 무신경하기 짝이 없는 나의 반응이 그녀의 빠네에 대한 애정을 집착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나는 정말 몰랐다. 그녀가 이렇게나 빠네를 좋아하는지도, 빠네 같은 음식(실례)에도 열화와 같은 애정이 형성될 수 있는지도.


  

  다행히 그녀는 이러한 사태를 미리 예견하고 빠네를 파는 파스타 집을 알아왔다. 빠네에 대한 무신경한 대응으로 화를 돋운 상황에서 빠네를 못 먹는 비극적인 일까지 벌어졌으면 그녀의 도끼눈에 노기까지 감돌 뻔했는데 다행이었다. 그녀는 과연 현명하다. 빠네 따위야(실례) 아무 때나 먹으면 될 것 아닌가,라고 남자 친구가 시큰둥하게 생각할 것까지 미리 꿰뚫어 보다니.

  

  그녀가 알아낸 파스타 집은 제법 맛있는 빠네를 내어왔다. 빵의 파낸 속을 버리지 않고 (만들면서 홀랑 집어먹지도 않고) 먹기 좋게 잘라 크림소스에 푹 적셔 주는 센스도 있었다. 빵 그릇은 뜨거운 크림 파스타를 담고서도 지나치게 침식되지 않고 단단함을 유지하였다. 크림소스는 깊이가 있으면서도 느끼하지 않았고 탄력 있는 면발엔 소스가 고루 배어있었다. 그녀도 만족했는지 도끼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생글생글 웃음을 띤 원래의 반달 같은 눈으로 돌아와 있었다.

  

  "맛있다. 그치, 오빠?"

  

  볼까지 빨갛게 상기된 채 빠네 영접을 마친 그녀가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힘껏 흔들며 엄지손가락까지 치켜세워 주었다. '다음에 또 빠네가 먹고 싶거든 바게트 속을 파올 테니 거기에 담아먹자.'라는 말은 속으로 꾹 삼켰다.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 다행이었다. 아무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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