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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기린 Sep 12. 2022

엄마는 나와 함께 태어났어

아직은 불리고 싶기보다 부르고 싶은 호칭


부산 여행에서, 소녀처럼 좋아했던 엄마


시험관의 과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호르몬 주사를 맞는 것도 처음에는 남편이 도와주었지만 성격 급한 나는 조심성 많은 남편보다 빠르게 주사를 놓을 수 있는 스스로에게 주사기를 넘겼다. 난자 채취 또한 수면마취의 공포를 빼면 견딜만했다.


정작 힘든 건 따로 있었다. 매우 희미했지만 난생처음 눈으로 확인한 임신테스트기의 두 줄에 설렌 것도 잠시,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을 때마다 '주수보다 진행이 느리다'는 소견에 그다음 진료를 기다릴 때까지 피를 말리는 불안함에 시달려야 했다. 5주 차로 진입하는 시점에서 보수적인 원장님으로부터 처음 희망적인 말을 들었다.


- 이 정도면 괜찮아요. 아기집도 난황도 잘 보이니 다음번에 오시면 심장 소리 들을 수 있을 거예요.


우리는 돌아오는 길에 태명을 지었고, 아기의 예정일을 계산해보며 다음 진료를 기대했다. 셋이 될 새로운 일상을 상상하며 집 안에 아기침대를 놓을 공간을 가늠해보기도 했다. 6주 차 진료 날. 초음파를 보면서 원장님의 고개가 갸우뚱했다.


- 심장 뛰는 소리가 안 들려요. 태아가 너무 작으면 그럴 수도 있는데 그래도 깜빡이는 건 보여야 하거든요. 거의 확실하게 유산인 것 같습니다.


- 착상이 늦은 거라면 아직 지켜봐야 할 때 아닌가요?


- 시험관은 주수에 따라 진행이 정확하지 않으면 결국 예후가 안 좋은 경우가 많아요. 수술 날짜를 잡고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고민해보시겠어요?


사실 이제는 안전하다고 완벽하게 믿은 건 아니었다. 여전히 최악의 경우를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실망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수술을 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되려면 확신이 필요했다. 원장님을 믿지만 급한 대로 다음날 동네 산부인과 예약을 했다. 그 병원의 원장님은 스타일이 또 달라서 감정적으로 공감을 해주려고 하시고 최대한 에둘러서 의견을 말씀하시는 스타일이었다. 그럼에도 의사로서의 소견은 동일했다.

"계류유산"이었다. 워낙 흔하다는, 하지만 그게 나일리는 없다고 생각했던 그 '사고'를 나도 당한 것이다.


엄마가 필요해


혼란스러움을 정리하는 와중에 이 사실을 엄마에게 알려야 하는지 고민이 되었다. 시험관 시술을 한 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유산을 했다고 하면 많이 당황스러워하겠지? 나중에 잘 되었을 때 이런 일도 있었다며 뒤늦은 푸념으로 마음을 털고 지금은 일단 함구하자.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예정대로 소파술을 받았고, 임신을 했을 때보다 심한 복통으로 더 분명하게 내 몸의 상태를 인지할 수 있었다. 수술한 주에 잡혀있던 모든 일정을 조정하고 일주일 간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혹시나 후폭풍이 있을까 싶어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꼭 필요한 일만 조심스레 하며 지냈다. 고맙게도 남편이 미역국을 냄비 가득 끓여주었다. 먹어야 한다길래 부탁했는데, 한 술 뜨는 족족 몸에 바로 흡수되는 느낌이라 정말 맛있게 먹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꼭 먹고 싶은 음식이 떠올랐다. 그건 바로 엄마의 닭죽과 전복죽이었다. 재료를 아끼지 않고 넣어 꾸덕할 정도로 응축된 그 구수한 맛에서 엄마의 마음과 정성을 느끼고 싶었다. 엄마는 내가 먹고 싶다고 하면 바로 해서 가져다줄 사람이었다. 살갑지는 않아도 살뜰하게 챙기는 건 남부럽지 않게 해주는 엄마니까. 그런데 내가 그걸 먹으면서 엄마에게 내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아마 엄마는 내 생각보다 더 속상해하고 힘들어할 것이다. 같은 상황도 더 크게 받아들이는 엄마의 성향을 잘 알아서 이런 상황을 공유하는 것이 엄마를 배려하지 않는 일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자기연민에 빠졌다. 이럴 때 부모에게 마음을 기댈 수 없다는 게, 나보다 엄마의 마음을 더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게 서글펐다. 호르몬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그런 생각으로 며칠을 끙끙 앓았다.  


아이의 상태를 추적하며 안정기에 돌입하기만을 바라던 그때와 비교하면 허무할 정도로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수술한 지 열흘쯤 지나자 몸은 정상 컨디션으로 돌아왔고 마침 엄마 아빠와 밖에서 식사를 할 일이 생겼다. 식사를 마치고 아빠가 차를 빼러 간 사이 엄마가 먼저 물었다.


- 병원은 잘 다니고 있니?


그냥 '응'이라고 했으면 될 평범한 안부인사였다. 하지만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내뱉고 말았다.


- 사실 나 임신했었어.


그리고는 아빠가 돌아오기까지 짧은 시간 동안 다급하게 상황을 요약했다. 엄마 역시 내가 임신을 한 게 아닌가 했었다고 한다. 나는 눈치채지 않게 행동한다고 했지만 아마도 엄마는 내 눈빛, 숨소리, 연락하는 횟수에서조차 평소와 다름을 느꼈나 보다. 시험관 시술을 반대했던 엄마는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내 마음을 먼저 위로해주었다. 괜찮냐고, 괜찮다고 짧지만 분명하게 토닥여주었다.


엄마는 결국 내가 만든 존재

사실 나는 엄마가 어렵다. 신경이 예민하고 기분변화가 큰 편이라 매사 조심스럽고 어떤 일이든 긍정적인 면보다는 수반되는 리스크에 더 집중하는 스타일이라 오히려 나는 대수롭지 않은 척, 괜찮은 척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엄마가 걱정할 필요 없을 만큼 믿음을 주지 못한 내 탓도 있을 것이다.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하고 엄마에게서 나를 분리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면서 나도 모르게 엄마는 나에게 '보호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나를 이해해주고 감싸주는 건 오로지 남편의 몫으로 돌려놓고 엄마에게만큼은 듬직한 맏딸이 되려고 노력했다. 그게 썩 성공적인 것 같지는 않지만 스스로는 늘 그런 생각을 가지고 엄마를 대했다. 그럼에도 엄마에게 내 사정을 털어놓고 나니 그 자체로도 엄청난 위안이 되었다. 역시 엄마는 엄마였다. 그냥 내 이야기를 들어줄 엄마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알 수 없는 큰 힘이 되는 기분이었다.


임신 준비를 하면서도 나는 내내 궁금했다. 모성애라는 건 뭔지, 아이가 태어나면 자연스레 생기는 것인지. 나 역시도 평범한 여느 엄마들처럼 내 아이를 대할 수 있을지 말이다. 내가 우리 엄마에게 간절히 바라지만 채워지지 않는 무조건적인 지지와 그로 인한 든든함을 나는 내 아이에게 느끼게 해 줄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할 때마다 한 번도 확신이 든 적이 없었다. 그저 생물학적인 시간에 떠밀려 엉겁결에 엄마가 되려고 하는 건 아닐까. 엄마에게 뜻밖의 위로를 받고 나서 깨달았다. 엄마도 그랬을 거라는 걸. 엄마는 나보다 10년도 더 젊은 나이에 엄마가 되었으니 더 어려웠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엄마'라는 건 노력한다고, 결심한다고 되는 건 아닌가 보다. 엄마라는 존재 역시 아이와 함께 태어나고, 아이와 함께 성장하고 끊임없이 학습하고 길들여야 하는 것 같다. 엄마에게 내가 바랐던 역할들이 어쩌면 내가 '엄마'라는 존재에 부여한 이상적인 모습일지도 모른다. 엄마도 그냥 '아이가 있는 사람'일뿐인데 왜 엄마라고 해서 항상 나보다 더 현명하고 이해와 배려가 많기를 바랐을까. 두 번째 아이가 찾아왔을 때는 내가 조금 더 성숙한 사람이 되어 있었으면 하는 새로운 바람을 가져본다.


엄마라는 것만으로 괜찮아

아직도 엄마는 내가 못마땅하면 필요 이상의 모진 말들을 한다. 인신공격이라고 생각될만한 말들도 서슴지 않는다. 물론 나도 아직 상처를 받는다. 그래도 달라진 점이 있다면 회복이 더 빨라졌다는 점이다. 엄마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내가 이 나이가 되도록 아직도 본인을 걱정시키는 모자란 딸일 테니, 내가 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도 한다. 엄마에게 휘둘리지 않으면서 감정적으로 예속되지 않으면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노련한 딸이 되고 싶다. 그리고 엄마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만큼은 절대 의심하지 않는다. 그게 내가 엄마가 대놓고 상처받으라고 하는 말들로부터 나를 방어할 수 있는 유일하고 강력한 비법이다.


몇 달이 될지, 몇 년이 될지 알 수 없지만 내가 누군가의 엄마가 되기 이전에 우리 엄마의 딸로서만 존재하는 남은 시간 동안을 최대한 누려보려고 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 시간 동안 엄마에게도 딸로서 좀 더 큰 기쁨을 드릴 수 있기를, 그래서 엄마가 보기에 내가 '엄마'가 되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어 안심할 수 있도록. 내 아이가 철이 들 때쯤엔 내가 자신의 엄마라는 사실에 감사할 수 있도록. '엄마'와 '엄마' 사이의 시간을 귀하게 써보려고 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내 마음을 상대에게 전하지 못하는 이 미숙함과 내면 깊숙한 곳뿌리 깊은 이기심과 싸우기 위해 조금 더 시간을 내서 글을 쓰려고 한다. 글만큼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다른 재주가 나에겐 없으니까.


사실은 엄마가 내 엄마라서, 좋다.

첫번째로, 존재한다는 자체가 좋다.

연약하고 잔병치레가 많아 걱정을 시켜도 크게 아픈 곳 없이 일상생활에 문제 없이 지내줘서 고맙다.

두번째로, 아빠와 함께해서 좋다.

내 작은 사랑의 그릇이 부족할 때, 아빠가 넘치도록 엄마를 담아줘서 다행이다.

세번째로, 최선을 다해서 좋다.

우리 엄마는 이해심이 넓거나 너그러운 사람은 아니지만 언제나 그게 엄마의 최선이라는 걸 알게끔한다.

  있는데  해주는  없다는  알기 때문에 골이 깊은 서운함은 생기지 않는다. 나에겐 그게 생각보다 중요하다.  세상의  어떤 엄마가 자식에게 완벽할까? 반대로 자식도 엄마에게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너무 가까워   그대로의 감정이 오고 가는 사이라서 서로를  오해할 수도 있는 사이인  엄마와 딸인  같다.


엄마, 엄마도 이제 서른아홉인 거야.

내 나이만큼만 엄마도 엄마인 거니까.

그러니까 지금 내가 부족한 만큼, 엄마도 부족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건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았어.

엄마가 내 엄마로서 내 옆에 올해도 있어줘서, 그 자체만으로도 무한정의 힘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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