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딸, 동료가 되어주는 멀티플레이어 그녀에게
나에겐 두 살 터울의 여동생이 있다. 나이 차이가 얼마 안 나지만 어릴 때부터 나는 어쩐지 동생이 훨씬 더 어리게 생각되었다.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서 서른한 가지 맛 중 하나를 골라 말하는 것조차 벌벌 떨던 수줍음 많던 아이의 손을 잡고 ‘너는 언니 없으면 아이스크림도 하나 못 사 먹니?’라고 면박 주며 대신 주문을 해주었다. 동생이 초등학교 6학년 일 때, 바로 옆에 있던 중학교에 다니던 나는 동생에게 집열쇠를 전달해 주고 학원에 가려고 초등학교에 가서는 ‘여기 3학년 교실이 어디예요?‘라고 물었다. 내 머릿속에서 한동안 동생은 나이도 먹지 않고, 자라지도 않는 마냥 아이인 것만 같았나 보다. 내 작고 어린 동생은(실제로 나는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동안 키가 갑자기 12cm가 커버려 동생과 지금까지도 10cm의 키 차이가 난다) 늘 내 뒤에 숨어서, 따라서, 쫓아서 그렇게 지냈었다.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동생에게도 저만의 관계와 자아가 깊어지며 독립심이 생겼고, 나와는 전혀 다른 성향을 지니게 되었다. 언젠가부터 ‘언니, 언니’ 부르는 말투가 칭얼거림이 아닌 으름장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우리의 연합작전은. 공공의 적이었던 엄마에게 투항하는 두 일병의 전우애가 생긴 것은.
엄마는 스물여섯에 나를 낳았다. 지금의 내 나이에 중학생 딸을 키우던 셈이니 얼마나 젊은 엄마였던가! 혈기 왕성한 나이에 아이 둘을 키우며 그 모든 에너지는 고스란히 육아에 집중되었고 숙제하는 시간, 귀가 시간, 밥이나 간식을 먹는 시간까지 일일이 챙기던 엄마로부터 우리는 모든 것을 나눠가졌다. 때로는 감시처럼 느껴졌던 엄마의 관심을 오롯이 혼자 받았다면 나나 동생 모두 버겁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첫째로서 모든 반항을 처음 시도하는 ‘파이오니아’가 되어 몇몇 작은 도로는 하이패스로 바꾸어둔 덕에 동생은 나라면 몇 대 얻어맞았을 일들도 무사통과했다. 반면 나에게 동생은 늘 ‘통곡의 벽’이 되어주었다. ‘도대체 우리 엄마는 왜 저렇게 독재자인 거야! 내 팔자야!! ‘라며 남들에겐 못할 엄마 흉을 보면 가장 내 마음과 가깝게 공감해 주면서도 ‘빠져나갈 길’을 일러주던 것도 동생이었다.
어느 날, 그녀가 떠났다
스물아홉. 나의 20대 마지막 해에 동생은 기어이 짐을 꾸려 훌쩍, 파리로 떠났다. 부모님은 몰랐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얘가 공언한 것처럼 1년만 있다가 돌아오는 일은 없을 거라는 걸. 아예 거기에 터를 잡으러 간다는 걸. 동생은 한국을 떠나 해외에서 혼자 살아보고 싶다는 열망을 품고, 차근차근 준비를 했다. 불어 자격증을 따고 열 달 아르바이트를 해서 천만 원을 모았다. 불문과라는 핑계와 어릴 때 잠시 배웠던 플룻을 목표로 내세워 부모님을 설득했다. 고작 학생 비자로, 고작 천만 원으로 얼마나 버티겠어?라는 생각이었겠지. 프랑스에 지인들도 있으니 원격 지원과 감독도 가능할 거야, 그랬겠지. 하지만 부모님과 다르게 늘 날 것 그대로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통하던 나는 그런 착각을 하지 않았다. 저 기집애는 안 돌아온다. 그럼에도 부모님께 함구했던 건 동생에 대한 응원이자 의리였다. 이번엔 내가 동생에게 ‘빠져나갈 길’이 되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나에게 결국 또 다른 ‘통곡’이 되는 길이었음을 그때는 몰랐다.
처음에는 동생을 핑계로 매 해 파리를 갈 수 있다는 게 설렜다. 동생이 한국을 방문할 때면 맛있는 걸 먹이고 좋은 곳에 데려가는 것이 즐거움이었다. 10년이 넘게 흐른 지금은 나도 그때처럼 자주 파리를 갈 수 없고 동생이 한국에 오는 것도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사실 지금도 동생이 2년 만에 한국에 방문 중이다. 고작 보름 동안 말이다. 보통 보름이라는 시간은 여행이라고 치면 꽤 긴 기간이다. 하지만 짧게는 1년, 길게는 2년에 한 번 동생과 함께하기에는 너무 부족한 시간이다. 나에게 동생과 함께하는 시간은 미뤄둔 건강검진을 받고 벼르던 맛집을 가고 미용실에서 매직펌을 하는 투 두 리스트를 제때에 수행할 수 있도록 돕는 것보다 훨씬 농밀하고 고착된 무언가를 기대하고 싶은 소망 같은 것이기에. 지그시 눈을 맞추고 중학생에 멈춰 있는 듯 자그마한 손을 만지고 명랑한 목소리를 듣고 요즘은 무슨 생각을 하며 지내는지 어려운 일은 없는지 끊임없이 묻고 싶은 긴긴밤 같은 그 시간을, 나는 갖고 싶다. 네가 나와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이 순간이 하루하루 일력을 뜯어내듯 무참히 스러져가는 잔혹함에 손가락이 베이듯 마음 아리고 또 아리다. 다른 자매들처럼 엄마나 남편 때문에 속 상할 때 망설임 없이 불러내 브런치라도 사주며 성토하고 지나가다 맘 내키는 대로 어울릴만한 옷이나 액세서리를 사 계절에 맞게 건네고 싶다. 그렇게 나는 또 동생이 와 있는 동안 동생이 없는 시간을 생각하며 괴롭다.
내가 동생에게 보이는 애정을 유난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몇몇 친구들, 그리고 남편. 보편적으로는 남매나 형제 사이보다는 자매 지간이 더 유착되기 쉬운 듯하다. 하지만 나처럼 자매가 있다고 해서 모두가 이렇게 애틋하진 않은 것 같다. 요즘날 엄마는 내가 아이가 있어야 할 나이에 없어서 그 모성이 다 동생에게로 향하는 것 아니냐고 한다. 남편은 본인과 형 사이에 그런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어쩌면 스스로 동생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줄 수 없었던 유년기와 각자의 연애나 일에 정신없어 흘려보냈던 20대를 지나 비로소 언니답게 동생을 대할 수 있을 시기에 남들과 다른 형편이 되어버렸으니 그 아쉬움에 감정이 증폭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멀리 있는 너보다 더 멀게 느껴지는 건
바로, 나
최근 몇 년 동안 나는 당장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들 외에는 신경 쓰지 않고 지냈다. 시험관 일정에 맞춰 언제든 변경될 수 있는 계획 따위, 세우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좋아하던 해외여행마저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프리랜서라는 핑계로 안주하고 언제가 될지 모르는 임신만을 기다리면서. 치열하게 노력하는 와중에 기약 없는 무기력이 합쳐지는 날들. 불쑥불쑥 혼란스럽고 지치는 마음으로 집중할 수 있는 것은 그날그날의 집안일과 식사준비, 아무 생각 없이 보기 좋은 연애프로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서글프게도 내가 나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너그러움을 남편에게 기대하긴 어려웠다. 현실주의자인 남편의 눈에는 내가 스스로의 삶을 일시정지한 것으로 보이는 듯했다. 때로는 돈을 핑계로, 한 번씩은 자기 계발을 내세우며 남편은 나를 질책했다.
어떤 남편들은 외벌이로 아내를 부양하는 것에 되려 자부심을 느끼기도 하고 어떤 친구들은 나보다 더 훌륭한 경력이 있음에도 아이를 키우는 데 전념하고 있는데 왜 나는 이대로 지내면 안 되는 걸까?라는 생각이 치밀 때면 남편이 야속하고 내 신세가 한탄스러웠다. 사실 나는 집에서 꽤 바지런하게 움직인다. 남편이 알지 못하는 아주 소소한 잡일까지 해내면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함께 여유 있는 저녁 시간을 보낼 때면 이렇게 지내는 것도 제법 만족스럽게 느껴진다. 성인이 된 이후로의 나를 돌이켜보면 나는 특별한 목적의식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모두가 무언가를 꼭 이루면서 살아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늘 주어진 역할에는 충실한 사람이었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내가 당장 해야 하는 일을 등한시하지 않았다. 스스로 새로운 도전을 하지는 않지만 닥친 과제에는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기능적인 인간형이랄까.
동생에게 일말의 경쟁의식 없이 자식에 준하는 보호본능을 느끼게 된 데에는 부모님의 영향이 크지 않았을까 하고 최근에 들어서야 생각해 본다. 나는 그저 내가 언니라서. 너의 탄생조차도 나의 외로움을 걱정하는 엄마의 마음에서 비롯되었어서, 부모님과 함께할 시간이 나보다 2년이 적어서 애틋한 거라고 믿었는데 어쩌면 우리의 유년시절에는 그 어떤 외부적인 두려움도 없게끔 완벽하게 안전한(우리가 통제라고 받아들였던) 울타리를 제공했던 부모님이 있었기에 그런 거라고. 무언가를 동생과 반으로 나누어야 할 일 없이 공평하게 제공되었고 누군가를 차이 나게 더 예뻐하지 않았으며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무조건적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걸 손수 보여주신 두 분 덕분에 자연스럽게 동생을 내가 살피고 배려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게 된 것 같다. 그런 무조건적인 베풂을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나는 아주 늦게 깨달았다. 직장에서 만난 스물두 살의 직원에게 ‘왜 한창 놀아야 할 나이에 벌써 일 하니?’라는 철없는 질문을 했었다. 그 친구가 ‘엄마가 혼자 계시는데 식당을 해요. 그런데 몸이 안 좋아서 예전만큼 일을 못해서요‘라고 대답했을 때 불현듯 나의 무례함을 알았다. 대학시절까지도 용돈을 더 쓰고 싶다는 목적으로 과외 아르바이트를 한 것 외에 돈을 벌어야 할 이유가 없었던 나는 오히려 엄마 카드로 제한 없이 용돈을 쓰고 자기 차를 몰고 다니는 친구들을 부러워했었다. 희한하게도 내 주변에는 나와 비슷하거나 더 풍족한 친구들 뿐이었던 것이다. 남편 역시 어머님이 가계를 책임지셨고 불규칙한 수입에 교복을 제때 맞추지 못할 뻔한 일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그런 이야기는 다큐멘터리나 인간극장에서나 들어보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나에게 주어진 행운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짐짓 모르는 척, 이 정도는 누구나 그렇지 않냐는 말로 교만을 숨기면서 내가 너무나 운 좋게 타고난 환경을 폄하하면서 그 이상을 추구하지 않았다.
“만약 지금 네가 혼자라면 스스로 동생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뭐야?”
부끄럽지만 이 또한 내가 아닌 남편의 질문이었다. ‘등록금을 당연히 아빠가 내줘야지 내가 왜 걱정해야 해?’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거의 전적으로 남편의 수입에 의지하고 있는 지금조차 나는 내가 우리 가정이 아닌 개인적인 용도로 돈을 쓰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당연히 우리 집 돈이니까 내 돈이지’라는 생각으로. 남편은 늘 기꺼이 나의 모든 필요를 지원해 줄 의향이 있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의 살아온 환경은 나와 다르다. 사람은 본인 스스로를 부양할 능력을 지녀야 하고 다른 이에게 의지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확고한 사람이다. 그걸 받아들이기까지 나도 어렵고 힘들었다.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이제 만들고 싶다.
그토록 사랑하는 너에게, 그리고 남편에게 내 스스로의 힘으로 해주고 싶은 일에는 분명 마음씀이나 맛있는 음식 외에 금전적인 일들도 있으니까. 어릴 때처럼 지금의 나도 당장 돈을 벌어야 할 갈급함은 없다. 그렇기에 오히려 동생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과거와 현재에 몰입해 어릴 적 나의 작고 소중한 동생, 지금의 애닲고 사랑스러운 동생에게 연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미래의 동생에게 힘이 되어주려면 내가 좀 더 독립적이고 씩씩해져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조금은 두렵지만, 언젠가 부모님이 돌아가신다면 그때는 이렇게 언니라는 마음만으로 동생의 버팀목이 되어주긴 곤란할 것이다. 내가 훗날 너에게, 진정한 의미의 부모 대신이 되기 위해 설령 진짜 나의 자녀가 생긴다 해도 우리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지원과 사랑을 나눠주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쌓아두려면(물론 자녀가 생기면 동생은 당연히 후순위가 될 거라 모두가 말하고 나 또한 그럴 거라 여겨지지만 아직은 아니므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내가 멀게 느껴진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 글을 읽고 내가 철이 없다고 생각할 거다. 하지만 나는 두렵다. 멀리 있는 나에게 다가갈 그 시간이, 그리고 멀지 않은 동생에 대한 내 역할의 전환이. 든든한 부모님과 남편의 그늘이 걷히는 그 언젠가를 떠올리는 일이.
동생의 삶은 그녀의 남편과 함께 프랑스에 있다. 나의 삶은 여기에 있다. 그 물리적인 거리가 압축된 시간으로 심장을 꽉 채워 갈 곳 없는 피가 몸 밖으로 빠져나간 듯 덜덜 떨린다. 그 차가운 기운을 따뜻하게 다시 채울 수 있는 것은 또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동생이 나를 언니로서, 엄마로서, 친구로서 찾을 때 어떤 역할로든 응수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이겠지. 마치 동생이 나에게 친구이고 딸이고 동료이듯 나 또한 너에게 멀티플레이어가 되고 싶다.
마음 깊이, 신실하게, 여한 없이 사랑한다. 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