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 아등바등했던 나를 위로하며
2015년. 내게 늘 관대했던 파리였지만 그 해의 파리는 조금 쌀쌀맞았다. 초여름에서 여름 사이에만 찾던 그곳에서 처음 느끼는 가을이었어서였을까. 짧아진 해가 덩달아 하루도 짧게 만드는 듯했다. 어둑해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오늘도 이렇게 끝나버렸네’라는 생각에 심장이 선선해지는 하루하루였다. 눈이 시리던 파리의 햇살은 사라지고 눈시울만 시렸던 시간이었다.
그 감정은 지금까지도 종종 악몽으로 소환된다. 꿈속에서 벼르던 놀이공원에 갔는데 한 시간 뒤면 폐장 시간이다. 나는 아직 놀이기구를 하나밖에 타지 못했다. 혹은 다음 여행지로 이동하는 동안 떠나온 곳에서 꼭 가 봤어야 하는 랜드마크를 건너뛴 것을 뒤늦게 알아챈다. 오늘 저녁은 내가 준비하겠다고 호언장담을 하고 마트에 갔는데 주요 식재료가 동이 나 있다. 실제로는 한 번도 겪지 않은 일들이 꿈속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벌어지고 나는 매번 가슴을 졸이며 식은땀을 흘리다가 깬다.
독일 옥터버페스트에서 시판되는 맥주보다 도수가 두 배 높은 생맥주를 맛보고
뮌헨에서부터 프랑크푸르트까지 렌터카로 이동하면서 유명한 소도시들에 들르고
프랑크프루트에서 파리로 이동해 친정식구들을 만나
프랑스 남부를 함께 여행한다
이게 내 2주 간의 여행 계획이었고,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것은 순조롭게 준비되었다.
여행지에 대해 알아보고 일정을 세운 후 목적지 별로 숙소를 정하고 이동 교통편을 예약하는 것이 나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초계획형 인간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B안, C안도 소용없게 만들어 버리는 불가항력의 변수들이다.
맥주를 좋아하는 남편은 옥터버페스트의 분위기는 좋아하지 않았고
들렀던 소도시들 모두 정말 아름답고 머무는 동안 즐거웠지만 운전은 피곤했으며
친정식구들과 남편이 함께 유럽에 있다는 것은 완전히 상상밖의 전개였고
프랑스 남부 여행은 홍수로 무산되었다.
그곳에 모두가 있었지만
내게는 아무도 없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파리로 넘어온 날부터 남편은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일주일 간의 독일여행은 이동이 많다 보니 체력적으로도 많이 지쳤고 마지막에 렌터카 반납처를 못 찾고 헤매면서 둘 다 긴장도가 최고조로 높아졌었다. 그래도 나는 내 가족들을 만난다는 기대감에 기운을 차렸는데 남편으로서는 즐거움보다 부담감이 더 큰 일정이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당시에는 이 여행을 순조롭게 이끄는 것에만 집중하느라 남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원망만 했다.
출국할 때부터 남편은 나에게 ‘돌발상황’ 그 자체였다. 비행기 탑승이 끝났는데 남편이 갑자기 지갑이 없다고 했다. 본인은 자기 자신만 챙기면 되는데 어떻게 이렇게 정신이 없을 수 있나. 그 지갑에는 국제면허증이 들어있었고 그게 없으면 여행이 불가능했다. 승무원에게 잠시만 내릴 수 있겠냐고 읍소하고 안된다는 거절을 듣고 한바탕 난리를 피운 후에야 남편의 가방 안에서 지갑을 찾았다. 옥토버페스트에 다녀온 후 두 번은 안 가도 되겠다는 남편에게 우리가 언제 또 옥터버페스트 기간에 맞춰 독일에 오겠냐, 온 김에 뮌헨에 있는 사흘 내내 이 축제를 즐겨야 한다고 했지만 그는 한국에서 마셔볼 수 없는 맥주를 맛본 것만으로도 충분하니 사람 많고 정신없는 그곳에 다시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아무리 외향형이어도 태초의 게르만인들처럼 맥주를 퍼 마시며 그 양만큼 침과 땀을 퍼 흘리는 사람들이 가득한 그곳에 혼자 갈 용기는 없었다. 뮌헨을 떠나며 렌터카를 인수하러 숙소에서부터 40분을 트램을 타고 갔는데 국제면허증을 두고 나온 남편 때문에 다시 돌아갔다 오느라 그날 일정이 어그러진 일도 있었다. 독일에서의 마지막 밤, 렌터카 반납처를 못 찾고 헤매느라 진땀을 뺀 후 숙소에 체크인하자마자 뻗어버린 남편 대신 혼자 낑낑대며 차 안에 마구잡이로 싣고 다니던 짐들을 캐리어 안에 새로 정리해서 넣는 것도 내 몫이었다. 궂은일은 내가 다 했는데 본인이 먼저 아프다고? 본인이 도맡아 한 일은 운전밖에 없는데? 게다가 여행은 아직 절반이 남아 있으며 지금부터는 우리 아빠, 엄마, 동생까지 함께해야 하는데? 남편과 내가 독일에 가기 전부터 부모님은 파리에 있는 동생 집에 머물고 계셨다. 엄마는 혼자 유학 생활하는 딸의 생활이 궁금해 격년으로 파리를 찾았지만 아빠와 함께 가신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래서 나만 파리에 가면 온 가족이 처음으로 파리에서 모이게 되는 거였다. 사실 나에게는 이 여행의 목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참에 신혼여행으로 갔던 파리를 3년 만에 남편과 다시 가고 싶기도 했고 예전에 동생과 둘이 다녀왔던 프랑스 남부를 부모님, 남편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컸다. 그래서 나에게는 남편의 컨디션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컨디션이 최상일 때에도 텐션이 높지 않은 사람이라 나를 보조해 이 여행을 이끌어가면서도 본인도 충분히 즐기려면 몸도 마음도 편안해야만 했다.
“오빠는 왜 하필 지금 아파?”
뒤죽박죽 머릿속에서 뽑아낸 한 가닥 말이 저거였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어렵게 마련한 시간인데 조금 더 노력해 주면 안 되는 걸까. 저렇게 아플 만큼 우리 식구들이 싫은 걸까. 그때에도 지금만큼 남편을 알았더라면 저따위로 말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남편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장시간 함께 있는 것을 힘들어한다. 그곳이 집이 아니라면 더욱. 그런 그에게 유럽에서 일주일 동안 처가식구와 함께 여행한다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편에게 이것은 노력여하로 컨트롤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는 것조차 그땐 몰랐다.
어쨌든 그 말은 이미 입 밖으로 나왔고,
남편은 절규에 가까운 말을 내질렀다.
“내가 아프고 싶어서 아파? 넌 어쩜 그렇게 잔인해?”
이후의 오전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다. 우격다짐으로 서로에게 상처 주는 말을 주고받으며 ‘프랑스에서는 옆 집에서 큰 소리가 나면 경찰에 신고한다던데, 경찰이 찾아오면 어쩌지?‘라는 생각까지 했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12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날 점심은 내가 예약해 둔 레스토랑에서 다 함께 식사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당시 프랑스 남부에 갑자기 홍수가 나서 니스로 향하는 철로가 흙에 묻히고 나무가 쓰러져 도로마저 통제되면서 일정이 모두 취소되었다. 그래서 급하게 계획을 변경해 엄마가 예전에 가보고 좋아했던 에트르타에 하루 다녀오고 2박 일정으로 벨기에에 다녀오기로 했다. 이렇게 다시 쓰면서 복기해 보니 그야말로 대환장의 연속이었구나. 벨기에에 가기 전 파리에서 이틀의 시간이 있었고 그마저 허송하게 보낼 수 없었던 나는 특별한 식사라도 하자며 파인 레스토랑을 예약한 것이었다. 그곳은 미슐렝 스타 셰프의 세컨드 레스토랑으로 비교적 합리적인 금액으로 수준 높은 코스 요리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었다. 지금부터 준비해서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데 남편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순간 기분 나쁜 사르르함이 아랫배에서 느껴졌다. 이 느낌은...! 그제서야 나는 여행 기간 내내 챙겨 먹던 피임약을 오늘 오전에 싸우느라 잊어버린 것을 깨달았다. 생리가 터져버린 것이었다. 눈물범벅의 얼굴로 파자마 위에 겉옷만 걸치고 숙소 근처 약국으로 달려갔다. 다짜고짜 번역기를 들이밀며 생리대를 찾는 괴이한 몰골의 동양여자가 무서웠을 법도 한데 직원은 친절하게도 종류 별로 생리대를 꺼내 보여주었다. 숙소에 돌아와 얼른 조치를 하고 옷을 챙겨 입고 다시 나서는 순간까지도 나는 서럽게 울부짖었다. 끝내 따라 나오지 않는 남편이 들으라는 듯.
약속 시간이 임박해 거의 뜀박질하듯 센 강을 따라 걸었다. 엄마에게 왜 김서방이 오지 않았는지 둘러댈 핑계를 떠올리느라 눈물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취소할 수 없는 이 식사를 나 때문에 망칠 수 없었다. 이미 어그러진 여행에 또 초를 칠 수는 없었다. 센 강이 내다보이는 통창 유리로 가족들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운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테이블에 앉으며 거짓 너스레를 떨었다.
“아휴, 강바람이 진짜 세서 눈물이 다 나더라. 오는 길 안 헤맸어? 오빠는 속이 좀 안 좋다고 해서 쉬라고 했어. 비싼 밥 제대로 못 먹음 아깝잖어.”
그렇게 우리는 속으로 각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겉으론 웃고, 떠들고, 사진 찍으며 아뮤즈부쉬부터 디저트까지 먹었다. 파리 올 때마다 동생 집에서 한식을 만들어 먹거나 저렴한 중식당, 쌀국수집 아니면 감자튀김을 주로 사 먹던 아빠 엄마 그리고 부모님에게 손 벌리지 않고 지내느라 외식은 누가 사줄 때 외엔 거의 하지 않던 동생에게 드디어 ‘파리 다운‘ 레스토랑에서 ‘프랑스 음식 다운’ 식사를 대접한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식사가 끝나자 엄마가 내 등을 떠밀며 얼른 숙소로 돌아가라고 했다. 아픈 사람 두고 혼자 나온 것도 마음 편하지 않다며 이제 우리끼리 놀 테니 너는 맛있는 거 사 가지고 바로 가라고. 이게 뭐람... 숙소에 남아있는 남편도, 함께 있는 가족들도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한 번만, 한 번 더가 여행을 망친다
그날 남편과 언제 화해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늦은 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아직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을 찾아 헤맸던 기억이 있는 것 보면 숙소에 돌아와 저녁까지도 냉랭했었나 보다. 어쩌면 이렇게 유럽에서 다 같이 모이는 게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는데 눈 딱 감고 한 번만 내 뜻대로 맞춰주면 안 되는 거였을까? 온몸으로 그렇게 투쟁을 해야 했을까? 결혼한 지 3년 차인데 아직도 처가식구들에게 마음을 열지 못한 것 같아 정말이지 실망스러웠다.
“너 혼자 보내서 미안해”
이 말을 듣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 벌어진 일련의 일들에서 나는 나를 걱정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아빠랑 엄마가 혹시 내가 남편이랑 싸운 걸 눈치채면 어쩌지, 오빠에게는 쏘아붙였지만 많이 아프다면 힘들어서 어쩌지 ‘ 등의 생각만 하느라 정작 내 몸상태나 내 기분은 돌보지 않았다. 오히려 남편이 예상 못한 변수가 되어버린 이 상황에서 나까지 계획대로 하지 않으면 이 여행을 망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더 다그쳤던 것 같다. 혼자 남겨진 남편은, 혼자 가버린 나를 걱정해 주었다. 그런데도 나는 남편이 내가 아닌 우리 가족에게 미안해하지 않을까 봐 전전긍긍했다. 식사에 참석하지 못해 죄송하다고 우리 부모님께 너무 늦지 않게 연락하길 바랐다. 남편의 사과를 듣는 순간 누가 누구에게 더 미안할 일인지를 따지는 것보다 서로의 마음을 보듬는 것이 당장에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그렇게 말해서 미안해. 그런데 오빠, 오늘 갔던 식당 정말 좋았는데 오빠도 내일 가보지 않을래? “
좋은 것이 있으면 꼭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시 해보고 싶어 하는(애당초 그런 내 성향 때문에 시작된 프랑스 여행이었지) 나는 다음날 점심에 그 식당을 남편과 다시 찾았다. 똑같은 음식을 두 번 먹었지만 남편에게도 이걸 먹였다는 안도감에 돈이 아깝지는 않았다.
그때 남편이 정말 바랐던 것은 코스요리가 아니었을 거다. 원가족과 함께 있을 때 본인은 뒷전인 것 같은 서운함을, 본인도 긴 휴가를 쓰고 온 유럽에서 자신도 아픈 게 못내 아쉬움을, 명절에 본가는 가보지도 못하면서 처가 식구들과 여행을 한다는 나름 효자의 통 큰 배려를 내가 온전히 알아주길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남편만 빼놓고’ 좋은 식사를 한 것이 더 마음에 걸렸다. 한 번 더 돈을 지불하기만 한다면 오늘의 후회는 날아갈 것 같았다.
나는 지금도 그 근사했던 레스토랑의 코스 요리가 구성도 맛도 전혀 기억나질 않는다. 첫 번째는 친정식구들의 기분을 두 번째는 남편의 기분을 살피느라 목구멍으로 넘기기만 했지 입으로는 즐기지 못했다. 멀리 떠나온 여행은 그만큼 기회비용이 커지기 때문에 아쉬운 것도 더 크게 와 박힌다. 다시는 이런 기회를 만들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초조함이 지금 이 순간을 완벽으로 채찍질한다. 내가 머릿속에 그렸던 파인레스토랑에서의 가족식사는 반쪽 자리로 두 번이나 반복됐지만 결코 완벽한 하나의 일정이 되지 못했다.
모두를 만족시키려고 나를 다그쳤던, 그러다 내 뒤에 서 있던 남편까지 함께 밀어냈던 그날, 어떤 여행은 여행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뼈가 시리게 느꼈다. 생소하게 서늘했던 파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