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을 집어삼킨 폐렴 바이러스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인가요?
그리고 그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나요? "
세계 공통 면접 단골 질문. 일본에서 취직 활동을 할 시절, 이 질문이 나올 때마다 나는 늘 같은 대답을 했었다.
"유학 중에 경험한 대지진입니다."
대학원에 입학을 한 달 앞두고 있던 어느 날. 방에서 늦은 점심 식사를 시작하려는데, 마치 고지라가 땅을 가르고 나오는 듯한 굉음이 들리더니, 이내 밥상이 뒤엎이고 찬장과 옷장에서 물건들이 쏟아져 내렸다. 그것은 일본 역사상 가장 강력한 지진으로 알려진 '311 동일본 대지진'이었다.
일주일 이상 이어진 여진 때문에 목조집 벽에서는 하루 종일 끼익 끼익대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나는 것도 소름 끼치게 싫지만, 소리가 멈추면 땅 속에서 여진보다 더 큰 본진(本震:잇따라 이어지는 지진 중 가장 큰 지진)을 만드려고 기를 모으고 있는 것 같아서 더 공포스러웠다.
언제든 도망갈 수 있도록 여권과 운동화를 구겨 넣은 피난 가방, 언제 단수가 될지 몰라서 페트병 이삼십 개씩 채워 놓은 물, 여기저기 놔둔 헬멧과 비상식. 전혀 일상적이지 않은 것들로 둘러싸인 일상이었다.
내가 그때의 위기를 견뎌낼 수 있었던 건,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혈혈단신 유학생이 걱정돼서 먹을 것을 들고 집으로 찾아와 준 친구들, 비상시에는 우리 집으로 뛰어 오라며 주소를 적은 종이를 건네준 한국어 과외 학생, 전철에서 여진을 만나 패닉이 되었을 때 진정하라며 어깨를 쓰다듬어 준 이름 모를 아주머니...
어떠한 위기라도 동지가 있으면 견딜만하다는 것을 배웠기에, 당장 대학원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 대신,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내 사람들을 챙기고 의지하며 견디는 방법을 선택했었다.
2020년 겨울. 뉴스에서는 여타 정치, 경제 이야기는 다 뒷전이고 하루 종일 폐렴 바이러스에 대해 떠들어댔다. 전염병 연구에 있어서는 일본 일인자라는 의학부 교수가 입술이 다 부르틀 정도로 열심히 열심히 설명하지만, 요지는 (1) 폐렴 바이러스 '코로나'가 세계를 잠식했다 (2)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3) 이 상황이 언제 끝날 지 모른다, 이 세 가지였다.
어떤 위기든 곁에 사람만 있으면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각종 전문가들은 감염이 확산되지 않도록 가능한 집 밖에 나가지 말라고 했다. 사람들과 모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고, 말도 섞지 말고.
가까운 사람일수록 거리를 두고 ‘종식되면 보자’며 피하는 것이 배려가 되는 이상한 분위기. 그래도 괜찮다. 매일 만나서(만날 수밖에 없는) 이 이상한 상황에 대해 넋두리할 직장 동료들, 어린이집 선생님들, 같은 어린이집에 다니는 엄마아빠들, 동지들이 있으니까.
이른 아침부터 속보 알림이 울렸다.
'정부, 전국 교육기관에 휴교 요청'
코로나 감염 확대를 막기 위해, 당장 3일 뒤부터 고등학교 이하의 모든 보육시설, 교육기관이 문을 닫는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물론 나의 반짝반짝 워킹맘을 실현시켜 준 어린이집도 포함해서.
일본 전국 각지의 맞벌이 부모와 그들의 직장은 대혼란에 빠졌다. SNS에서는 육아 중인 직원에게 무급 자택대기를 강요하거나, 강제로 업무 배제를 하는 직장이 있다는 이야기에 갑론을박이 펼쳐질 정도였다.
운이 좋게도, 남편과 나 각자의 직장은 교육기관의 휴교가 끝날 때까지 재택근무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재택근무를 위한 인트라넷 환경, 온라인 회의를 할 수 있는 툴, 페이퍼리스 대책... 뭐 하나 제대로 갖춰진 것은 없지만, 범세계적 수준의 위기 속에서도 회사가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으리라.
2020년 3월 2일, 일 분 일 초도 혼자 있기 싫어하는 두 살배기 아이의 가정보육과 재택근무의 멀티플레이가 시작됐다.
이번에는 함께 할 동지도 전우도 없다. 오직 한 지붕 아래에 있는 남편과 나, 둘의 힘으로 이겨내야 한다.
우리의 첫 번째 작전은 교대로 아이 마크하기. 각자 스케줄이 겹치지 않게 업무 일정을 잡아서 움직이는 작전이다. 한 명이 바쁠 때에는 나머지 하나가 아이를 돌보고, 바통터치해서 밥을 먹이고, 순서대로 놀아주고…
이 작전은 재택근무 반나절만에 실패했다. '종이 사랑', '아날로그 지옥'이라 불리는 일본회사의 첫 재택근무가 순탄할 리가 없지. 아침부터 "주임님, 그 자료 어디에 있어요?", "도장을 찍어야 하는 서류는 어떻게 할까요?", "팩스로 연락이 왔는데... "... 긴급 전화와 비상 회의가 끊이지 않았다. 우리가 일 때문에 잠시라도 아이에게서 눈을 떼면, 아이는 왜 어른이 돼서 아기를 보살피지 않느냐는 듯이 울고 불고 난리가 났다.
두 번째 작전은 장난감으로 유혹하기. 이틀에 한 번 꼴로 새로운 장난감을 주문해서 신나게 놀리는 방법이다. 우리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는지, 이때 아마존 재팬에서 판매하는 장난감의 절반은 배송지연이거나 품절이어서, 콘서트 티켓팅을 하듯 열심히 클릭해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중요한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우리 아이는 아직 혼자 장난감을 터득하고 놀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라는 것을.
두 살을 갓 넘긴 아이에게는, 아무리 새롭고 화려한 장난감이라도 어른 하나가 붙어서 아이보다 더 열정적으로 놀아줘야 한다. "잠깐만 이걸로 놀고 있어 줘!"라고 사정사정하고 급한 용무를 볼라치면, 아이는 이내 장난감을 던져 버리고 동네 건달처럼 이 방 저 방 쳐들어와서는, 화상 회의에 얼굴을 내밀거나 통화 중인 전화기 화면을 눌러댔다.
세 번째는 아끼고 아끼던 나의 마지막 동아줄, 미디어다.
다른 건 몰라도 미디어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소신을 가지고 꾸준히 조절하고 제한해 왔는데… 이제는 정말 방법이 없다. 24개월도 지났으니까 조금씩은 괜찮겠지!
그동안 미디어 노출이 적었던 덕분인지 때문인지, 아이는 갑작스럽게 활짝 열린 미디어 세상에 더더욱 깊이 빠져 들었다. 마치 화면에 나오는 모든 그림과 이야기를 통째로 외워버리겠다는 듯이, 아이는 미동 하나 없이 화면에 집중 또 집중했다. 아이가 미디어에 흠뻑 빠져 준 덕분에, 우리는 쌓여있던 업무를 계획적으로, 집중적으로 처리할 수 있었다. 이 좋은 방법을 왜 이제 썼지?
세 번째 작전은 한 달이 넘게 이어졌다. 미디어를 시청하는 시간은 하루 10분에서 30분으로, 30분에서 한 시간, 세 시간… 아이가 미디어에 빠진 순간을 백분 활용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우리는 더더욱 일에 깊이 몰두했다. 아이만 덩그러니 두고 각자 다른 방에서 일을 하기도 하고, 마주 앉아서 작업을 하더라도 노트북 속 세상에 빠져있느라 몇 시간이고 말 한마디 나누지 않을 때가 많았다.
저녁 6시, 고요 속의 재택근무가 끝났다. 오늘의 미디어 시청 시간은… 꽤 긴 시간임이 분명하지만, 그만큼 일도 잘 끝냈으니까, 괜찮아.
같은 자세로 오래 앉아 있으면 몸도 불편하고 목도 마를 텐데, 아이는 말없이 화면만 보고 있었다.
"죠죠야, 엄마 일 끝났으니까 이제 끄자.
목마르지? 물 마실래? "
"… "
"들었니? 목 안 말라? "
"… 모 안마라? "
더 빨리 눈치챘어야 했다.
조금 어둔한 발음이기는 해도, 엄마, 물, 이거, 저거... 어느 정도는 말할 수 있던 아이가 요즘 들어서 단어다운 단어를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질문을 하면 간단한 단어로라도 대답하던 아이가 언제부턴가 앵무새처럼 질문을 따라 하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