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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워킹맘, 멋있으니까

빼입은 슈트, 노트북 가방, 그리고 마마차리

by 모모

나는 평소에 상상을 많이 하는 편이다. 주로 공상, 망상, 뜬구름 잡기에 가까운 것들이지만. 대학교 4학년 중간고사 기간, 해야 하는 공부는 안 하고 침대에 엎드려서 버킷 리스트인지 뭔지를 끄적일 때도 그랬다.


□외국 생활하기

□외국 회사에 들어가기

□워킹맘 되기


'너무 먼 나라는 한국에 왔다 갔다 하기가 힘드니까 일본이나 중국정도면 괜찮을 거야. 그곳에서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취직도 쉽게 성공하겠지. 일을 하면서 결혼도 하고 출산도 하고, 마지막 단추는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반짝반짝 워킹맘… '

한심하게도 얼마나 힘들지는 가늠해 보지 않았다. 단지, 멋있으니까.


버킷리스트 때문만은 아니지만, 정말 나는 대학 졸업과 함께 도쿄로 떠났다. 조금 덜 순탄했다면 잠시 멈춰 서서 방향을 바꿔 볼 수도 있었을 텐데. 운이 좋은 건지, 무식함에서 비롯된 용기 덕분인지, 상상했던 것들이 생각한 것보다 빨리 이루어졌다.

'다음은 워킹맘이다 '




"지긋지긋한 어린이집 입소 전쟁에서 탈출한 걸 축하해, 짠! "

"짠! “

근데, 우리가 합격한 어린이집이 어디에 있는 거였지?"


그랬다. 급하게 어린이집을 신청하려다 보니, 당시의 나는 어디에 뭐가 있는지, 어떠한 기준으로 골라야 하는지도 몰랐다. 다들 10개에서 많게는 20개도 지원한다는 구청 직원의 말에 홀려서, 지도 어플로 3킬로미터 근방에 있는 열다섯 개의 어린이집을 추려서 가까운 순서대로 지망 순위를 썼었다.


입소 내정을 받은(결국 몇 지망인지도 기억나지 않아서 괜히 미안한) 곳은 평소에 지나 본 적도 없는 골목에 자리한 어린이집이었다. 집에서 어린이집까지 빠른 길로 가면 1.3킬로미터, 어린이집에서 전철역까지 다시 800미터, 그곳에서 전철을 타면 회사까지 한 시간.

꽤나 돌아가는 출근길이지만, 도쿄의 어린이집 격전구에서는 널린 돌멩이처럼 흔한 일이다. 반짝반짝 워킹맘이 되려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이겨내는 수밖에.




2주간의 어린이집 적응기간을 마치고, 진정한 워킹맘 라이프가 시작되었다.

24시간 꾀죄죄한 모습으로 아기만 바라보던 생활에서 벗어나 옷을 갖춰 입고, 육아보다 오천만 배는 자신 있는 내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한동안은 출근길이 힘든 줄도 몰랐다.

'반짝반짝 워킹맘'은 조금씩 변질돼서, 일본 잡지에 자주 연재되는 워킹맘 코디(ワーママコーデ)를 한껏 흉내 낸 슈트 차림에 커피와 노트북 가방을 들고 혼자 흡족해하기도 하고, 서둘러 아이를 맡기고 나오다가 어린이집 유리창에 비친 나의 실루엣을 보고는 '바쁜 모습이 그럴싸한데? '라며 자아도취에 빠지기도 했다.


허세 짙은 워킹맘 놀이도 잠시, 한 달이 채 안 돼서 안개가 걷히듯 현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린이집 짐과 가방이 주렁주렁 달린 유모차를 밀며 한참을 걷고 나면, 전철을 타기도 전에 기진맥진. 버스는 조금 나을 거라 믿었지만, 출근시간 만원 버스가 비좁았는지 지루했는지 아이는 타는 내내 징징징. 큰맘 먹고 택시를 타면, 아침부터 길이 막혀서 걷기보다 시간은 더 걸리고 도쿄의 택시 미터기는 내 심박수보다도 빨리 올라가서 내 마음이 다 징징징...


‘역시 마마차리*인가? '


*마마차리: 엄마(ママ)와 자전거(チャリンコ)의 결합어. 경량 경자전거, 바구니가 있는 자전거, 다인승 자전거 등 생활형 자전거 모두를 통칭하는 말로, 본 글에서는 차일드 시트가 있는 다인승 전동 마마차리의 의미로 사용했다.


나는 사실 자전거를 좋아하지 않는다.

신입 사원 연수로 규슈(九州)에 살았을 때, 걷기에는 멀고 1년의 연수 때문에 차를 사기는 애매해서 자전거로 출퇴근을 했었다. 매일매일 자전거와 함께 하다 보니 타는 실력도 자신감도 수직 상승… 한 것이 문제였다. '운전은 자신 있을 때가 가장 위험하다' 던 어머니의 말씀을 명심했어야 했는데. 기숙사 앞 좁은 길을 호기롭게 질주하다가, 하필이면 마침 지나가던 회사 선배들 앞에서 허수아비처럼 부웅 날아서 바닥에 나동그라진 뒤로, 자전거는 쳐다도 보지 않게 되었다.


아침방송에서 도쿄의 육아 필수품 1위는 마마차리라며 떠들어 댈 때에도, 마마차리를 가진 마마토모(전회 참조)들끼리 뭉쳐서 한참 떨어져 있는 맛집에 다녀온다고 했을 때에도, 있으면 편리하기야 하겠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

퇴근 후 터벅터벅 어린이집으로 향하던 저녁. 마침 거리에는 무수히 많은 마마차리가 스쳐 지나갔다. 은은한 노을 빛을 등에 업고, 아이의 조잘거림을 들으며 달리는 엄마들. 그날은 유난히 그 풍경이 반짝반짝 빛나 보였다.


‘이거다! ‘




큰 맘먹고 마마차리를 샀다. 앞에는 노트북 가방을 넣을 큰 바구니, 뒤에는 차일드 시트와 레인 커버가 달린 녀석으로. 오랜만에 자전거를 타는 것이 무섭기도 했지만, 힘들이지 않고도 나아갈 수 있게 해 주는 전동 엔진과 대용량 배터리 덕분에, 운전은 일반 자전거보다 훨씬 수월했다.

첫날은 난생처음으로 써 보는 헬맷을 아이가 온몸으로 거부하는 통에 출발하는 데까지 한참이 걸렸다. 그래도 자전거를 타고 바람을 가르는 기분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며칠 지나고부터는 먼저 헬맷을 가져와서 나가자고 졸라댔다.


오랜만에 돌아간 일터는 일터대로 하루하루가 전쟁이고, 첫 기관 생활을 시작한 아이는 격주로 열감기에, 콧물, 기침에… 워킹맘 라이프가 시작되고 쉬운 게 하나도 없지만, 출퇴근길이 조금 편해진 것만으로도 제법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시간, 뒤에서 들려오는 아이의 노래에 맞춰서 페달을 밟을 때면—노을빛 필터를 입힌 일본 드라마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오늘 하루도 고생한 반짝반짝 워킹맘,

역시 멋있잖아 ‘


꿈꾸던 내 모습에 한 발짝 가까워진 것 같아서, 하루하루 소소한 충족감과 행복에 젖어 지냈다.



적어도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우리 가족에게 침투하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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