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누가 더 힘드나 시합에서 살아남기
"어린이집은 알아봤어? "
회사 사람들에게 임신 사실을 알린 날, 이웃 부서 선배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꺼냈다. 당황한 내 눈빛을 읽은 건지, 선배는 도쿄의 어린이집 경쟁률이 어마어마해서 나의 복직을 걱정하는 마음에 말한 거라고 덧붙였다. 마음은 고맙지만, 임신의 기쁨과 축하를 비집고 들어오기에는 조금 이른 이야기 아닌가. 게다가 출산 후에 문제없이 복직해서 야근에, 출장에, 최근에는 승진까지 한 선배가 이야기하니 더더욱 와닿지가 않았다.
그때 선배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듣지 않았다면, 훗날의 나는 조금 달랐을까.
타국에서의 육아 시작. 10초 건너뛰기 버튼을 연달아 눌러댄 것처럼 신생아 시기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고, 아이는 어느새 혼자 앉고 기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도쿄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달라진 점은 마마토모(ママ友: 엄마와 친구의 결합어)가 잔뜩 생겼다는 것이다. 일본에는 한국의 맘카페 같은 주부들의 커뮤니티가 없는 대신, 아이들을 통해서 연결된 엄마들 간의 관계 ‘마마토모’끼리 그룹을 만들고, 각종 정보를 공유하거나 육아의 고충을 나눈다.
"다들 어린이집 어떻게 할 거야? "
"우리 애는 생일이 빨라서 작년부터 신청했는데, 계속 대기 중이야. 길게 쉴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 이번에도 떨어지면 퇴사해야 할 것 같아 "
"내가 아는 마마토모도 결국 대기아동이 적은 동네로 이사 간다고 하더라고 "
"남편은 시댁과 합가 해서 부모님께 아이를 맡기고 복직하는 게 어떠냐고는 하는데, 휴…"
퇴직, 이사, 합가. 혈혈단신 타국에 정착한 외국인 엄마에게는 무척 부담스러운 단어들이다. 어린이집 하나 때문에, 직장의 이름으로 취로비자를 받아서 일본에 살고 있는 내가 퇴사를 한다…? 수년을 들여서 관계를 만들고 정착한 동네를 떠나서 다시 시작한다…? 그동안 내가 너무 방심하고 있었나.
전에도 회사에서 어린이집 이야기를 듣고, 집 근처 보육시설을 찾아본 적이 있었다. 구, 시에서 인정하는 인가(認可) 어린이집부터 비인가 어린이집, 임시 보육소… 생각보다 크고 작은 보육 시설이 꽤 있는 것 같아서 이내 안심하고 접어 뒀었다.
마마토모들과 이야기하면서, 일본의 보육시설은 구, 시 단위로 관리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현재 거주하는 구내의 어린이집을 지원해야 한다는 것, 우리 동네는 구와 구의 경계에 있어서 집 근처 시설의 절반은 지원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리고, 마침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도쿄도 안에서도 대기 아동이 넘쳐나는 ‘어린이집 격전구(激戦区)’로 구분된다는 것도.
급한 마음에 구청에 가서 어린이집 모집요강을 받아 왔다.
<어린이집 입소 조정 기준>
보호자의 월/주당 근무 시간별 10~20점, 보호자의 사망이나 이혼 등으로 인한 부재 여부 20점, 보호자의 건강 상태• 입원/통원 일수별 12~20점, 육아를 도와줄 수 있는 18~65세 친족이 있는 경우 -1점… 보호자의 근무 형태, 근속 기간…
개인사, 가정사를 탈탈 털어 넣은 심사 기준으로 부모의 점수를 매기고, 지망 순위의 순서대로 같은 어린이집을 지원한 사람들끼리 대결을 붙였다가 떨어뜨렸다가를 반복하는 심사 방식. 마치 엄마, 아빠들을 오징어 게임에서나 볼 법한 방에 가둬 놓고 ‘누가 누가 더 힘드나’ 시합을 붙여서 이긴 녀석만 나갈 수 있다고 하는 것만 같다.
특별할 것 없는(가산점을 받을만한 요소가 없는) 평범한 맞벌이 부부가 할 수 있는 것은 ‘때마침 공석이 있는 어린이집’과 ‘동점이거나 1점이라도 낮은 경쟁자’를 동시에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뿐이다.
그 바람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내가 희망하는 시기와는 관계없이 일단 입소 전쟁에 참전해야 한다.
"저.. 11월 어린이집 입소 상담을 하고 싶은데요 "
"지난 4월에는 신청하지 않으셨네요. 지금 0세 중도 입소가 가능한 곳이 없어요. 학기가 바뀌는 내년 4월 입소로 신청 준비하세요 “
"내년 4월이요? 아직 반년이나 남았는데, 그동안 자리가 날 가능성은… 미리 신청이라도 해 두면 안 될까요? "
"사회 보호 대상자이거나 다자녀는 아니시죠?
그럼 4월 입소 준비하세요. 내년 4월 입소 1차 신청기간도 당장 10월 한 달뿐이라서 시간이 없어요 "
중도 참전, 아니 중도 입소 신청은 합격률이 높지 않을 거라 예상하기는 했지만, 지금 그 점수로는 택도 없으니 내년을 준비하란다. 그리고 내년도 입소 신청 기간은 또 왜 그리 빠르고 짧은 지! 주저할 틈도 없이 당장 내일부터 서류 준비를 시작해야 할 판이다.
꼬박 3주가 걸려서 각종 서류를 모으고, 구청에 확인 또 확인하며 4월 입소 신청을 마쳤다.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처음에는 어린이집 입소를 만만하게 봤던 나 자신을 원망했다가... 조금 지나서는 어린이집 하나 때문에 다 접고 귀국해서 폐인처럼 사는 악몽을 꾸기도 했다가... 나중에는 무기력하게 판결문을 기다리는 죄수와도 같은 마음이 되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틈틈이 비인가 시설도 찾아보았지만, 선착순이나 추첨 선발이 많아서인지, 이미 대기자가 많다고 신청 거부를 당하거나 이유도 모른 채 불합격 통지를 받았다.
그때, 회사 선배의 진심 어린 걱정을 귀담아 들었더라면. 어린이집 입소에 실패해서 친정에 아이를 보내고 주말가족이 되어서야 복직할 수 있었던 선배의 사정을 일찍이 알았더라면. 지금의 나는 조금 달랐을까.
어린이집을 신청한 지 3개월이 지나고, 집으로 초록색 봉투 하나가 도착했다.
<어린이집 입소내정 통지서>
•결과:입소 내정(入所内定)
•기관명:콤비플라자 어린이집
'해방이다! '
아이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와 남편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아껴뒀던 자가리코(じゃがりこ:카르비 주식회사가 제조한 일본의 인기 감자 스낵) 하나와 맥주를 꺼냈다.
"가산점 받을 항목이 없어서 더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정말 다행이야. 우리는 외국인이고 일본에 육아를 도와줄 사람이 없다고 구구절절하게 편지를 쓴 게 참작이 된 걸까? "
"그럴지도 몰라. 동점자가 많으면 심사 기준이 아니었던 부분도 다시 한번 보게 될 테니까 “
"살다 보니, 외국인이라서 다행일 때가 다 있네.
어린이집 입소 전쟁에서 탈출한 걸 축하해, 짠! ”
그날은 여느 때보다 많은 맥주캔을 비웠다. 이것이 전쟁의 끝인지 시작인지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