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현장 속으로 3회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dept=115&art_id=201907191526441
국가와 조직이 보호해주지 않는 환경에서 고군분투해도 비난 쏟아져
최근 인기리에 상영된 영화 <걸캅스>에서 형사역의 배우 이성경씨가 범인을 향해 총을 쏘는 대신 던지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에서 많은 관객들이 웃었지만 나는 차마 웃을 수 없었다. 씀바귀를 삼킨 것처럼 씁쓸한 맛이 입에서 떠나질 않았다. 경찰관들 사이에서 총은 ‘쏘는’ 것이 아니라 ‘던지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경찰관의 대처가 사실은 결코 웃어 넘길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을 관객들은 알고 있을까.
끊임없이 나오는 경찰과 관련된 뉴스를 볼 때마다(경찰관 개인의 위법·일탈 행위에 관한 보도를 말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나는 UFC 경기장을 떠올린다. 경찰관은 아무런 보호장비도 없이, 그렇다고 공격할 힘도 없이 링 위에 올라가 있고 상대방은 연신 경찰관을 두들긴다. 심지어 한 명이 아니다. 그 수는 셀 수도 없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공격을 당해 너덜너덜해진 경찰관은 견디다 못해 마지막 한마디를 내뱉는다. “모두 다 저의 잘못입니다.” 지금 경찰이 처한 현실은 이 링 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응급처치 상황 주저할 수밖에 없어
지난 6월 10일 또다시 경찰과 관련된 뉴스가 보도됐다. 경찰이 흉기에 찔린 피해자를 앞에 두고 119 구급대가 도착할 때까지 응급처치를 하지 않은 것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당시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은 피해자의 맥박이 잡히지 않아 이미 사망한 줄 알았으며, 현장을 보존하려 했다고 진술했다.
나는 이 사람을 비난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내가 현장에 있었다면 달리 대처했을까? 그것도 모르겠다.
그럼 상황을 바꿔 가정해보자. 만약 경찰관이 현장에서 응급처치를 했다면? 칼에 찔려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에게 앞뒤 상황도 보지 않고 무리하게 심폐소생술을 실시하다 피해자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는 뉴스가 보도되지 않았을까? 게다가 난입한 현장이기 때문에 피해자의 몸이나 옷 등에 있었을 증거가 훼손될 가능성도 높다.
이 사건의 경우 범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에, 즉 범인이 밝혀졌기 때문에 현장 훼손에 대한 언급이 나올 수 없었지만 만약 범인이 잡히지 않았다면 현장 훼손에 대한 강도 높은 비난도 따랐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경찰은 이래도 욕을 먹고 저래도 욕을 먹게 되어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비난을 받아야 할 사람은 단 한 명, 오로지 가해자뿐이다.
경찰관은 의료전문가가 아니다.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는 사람이 죽었는지, 당장 응급처치를 하면 살 수 있는 상태인지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 관내에 조현병을 앓는 20대 남자가 있다. 그는 송곳을 들고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가게의 에어 간판과 현수막을 무차별적으로 찌르고 다녔다. 수상한 남자가 드라이버로 추정되는 물체를 들고 동네 현수막을 찢고 다닌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에게 남자는 “드라이버가 아니라 송곳”이라면서 “제대로 알고 일을 처리하라”며 씩 웃기까지 했다.
위험성이 충분하다고 판단한 현장 경찰관들은 그를 인근 정신병원에 응급입원 조치했지만 다음날 남자의 가족이 찾아와 퇴원을 시켰다고 한다. 가족이 한마디만 하면 퇴원이 가능한 응급입원은 과연 실효성이 있는 제도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 남자는 풀려난 날 또다시 송곳 대신 실과 바늘을 들고 동네를 돌아다녔다. 그는 누군가 자신에게 해를 가할 것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자신을 방어할 무기가 될 만한 것은 닥치는대로 소지하고 다녔다. 이대로 놔둔다면 언젠가 그가 큰 사건을 일으켜 뉴스에 대대적으로 보도될 수도 있었다. 그러면 언론은 경찰의 안일한 대처가 화를 키웠다며 신나게 두들길지도 모른다. 몇 달 전 벌어진 진주 방화사건처럼 현장 경찰관들만 줄줄이 징계를 받고 좌천되고 말지도 모른다. 사회적 합의를 통해 각 부처가 참여해 최대한 합리적인 대처 및 예방 방안을 도출해야만 할 문제에서 왜 매번 경찰관에게만 화살이 돌아간 채 상황이 마무리되는 것인지 나는 앞이 깜깜하다.
편의점에서 소주병을 깬 뒤 그걸로 자신의 손목을 찔러 자해한 남자가 있었다. 하지만 출동 경찰관은 아무런 조치를 하지 못했다. 그저, 피를 흘리며 돌아다니는 그 남자에게 “선생님, 제발 병원 좀 갑시다”라고 읍소하며 졸졸 따라다니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119에 문의를 하니 환자가 이송을 거부하는 상황에서는 병원에 강제로 데려갈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고 손목에 피가 분수처럼 솟아나고 있는 사람에게 수갑을 채워 강제로 데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랬다가는 ‘자해한 남성을 수갑 채워 강제 이송’ 정도의 제목으로 언론에 보도된 뒤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를 받을 것이 뻔했다. 형법상 자기 몸을 파괴하는 것은 딱히 물을 죄책도 없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며 남자의 뒤만 따라다니다가 그가 과다출혈로 쓰러져 의식을 잃고 나서야 병원으로 이송할 수 있었다. 답답한 노릇이지만 이것이 지금 대한민국 경찰관과 공권력의 현실이다.
교도소 담장을 걷는 경찰의 일
나는 미국 드라마 <CSI: 라스베가스>를 즐겨 보는 편이다. 드라마 속 경찰관이 주저없이 범인에게 총을 쏘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같은 경찰인데도 매번 놀란다. 투항하라는 명령을 3회 이상 거부하면 주인공들은 아무 거리낌없이 범인에게 총을 쏘았다. 그리고 총에 맞은 범인이 사망하면 남은 사건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에 빠진다. 대한민국 경찰관인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미국의 여경들은 현장에 혼자 나가도 범인 제압이 가능하다고 한다. 미국의 여경들은 한국의 여경들에 비해 덩치가 크고, 힘이 어마어마하게 세서 제압이 가능한 게 아니다. 미국 여경들의 체력시험 기준이 한국에 비해 높아서도 아니다. 그건 미국의 경찰이 가지는 공권력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공포심을 자아낼 정도다. 나는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기관총을 장착한 채 관광객들을 노려보고 있던 뉴욕 경찰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한국에서는 배우 마동석씨가 경찰관이 된다 해도 그 힘의 10%도 사용하지 못할 것이라고 감히 장담할 수 있다. 현장에서 누군가를 강력하게 제압할 수 있는 공권력과 제도가 따라주지 않는 이상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모두가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국민들은 왜 경찰의 현실을 제대로 보려 하지 않는 것일까. 오늘도 답 없는 물음만 홀로 던져 본다.
“경찰 일은 교도소 담장을 걷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 국가와 경찰 조직이 보호해주지 않는 환경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다 사라지는 선배들을 너무도 많이 봤다. 그 모습을 지켜봐 온 후배와 동료들이 다른 사건에서 적극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을까? 사명감은 강요한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언제까지 이 길고 얇은 담장을 나의 균형감각에만 의존한 채 걸을 수 있을까. 여전히 이 질문에 답을 찾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