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추어진 아이를 위해서...
"00이 왔구나! 오랜만이다. 키도 크고 더 잘생겨졌는걸!"
"네 선생님 안녕하세요?"
"고등학교 생활은 좀 어때?"
"네 잘 지내고 있어요."
"그래 오늘 어떻게 왔어? "
"네 작년 우리 담임선생님 뵈러 왔어요."
"그렇구나 조금만 기다려 곧 수업 끝날 거야"
작년 중3 학생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아이가 한 명 있습니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여 매우 힘들어하는 아이였습니다. 거의 매 수업시간마다 복도에 나와 있었고 담임선생님이 수업 없는 시간이면 선생님과 많은 이야기했던 아이였습니다. 1년에 네 차례 있는 지필고사도 OMR 카드에 한 줄로 세우고는 복도나 보건실에 있던 아이였습니다.
급기야는 친한 친구 한 명이 인근 학교에 다니는데 그 학교로 전학을 보내달라고 애원(호소, 강압, 민원)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부모님도 자녀의 뜻을 굽히지 못하고 전학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런데 동일 학군 내에서는 전학이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습니다. 전학을 허용할 경우 원치 않는 학교에 배정을 받았거나 학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특정 선호 학교에 학생들이 몰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외가 있습니다. 정말 객관적으로 타당한 사유가 있다면 동일 학군에서도 전학이 가능한데 이 또한 두 학교 교장의 허가가 있어야 합니다.
교장, 교감, 담임교사, 상담교사, 보건교사로 구성된 학교위기관리위원회를 열어 전학을 보내는 것이 학생을 위하는 것인지에 대해 오랫동안 협의를 했습니다. 그 결과 전학을 보내지 않는 것이 학생을 위하는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 이유는 친한 친구 한 명만 보고 곧 졸업할 아이가 전학을 가는 것은 무리가 있었고, 더 중요한 이유는 그 친한 친구 또한 학교에서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전학 가려고 마음 굳힌 아이는 뜻대로 되지 않자 더 힘들어했고 수업도 더 소홀히 했습니다.
그런데 이 학생 곁에는 담임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이 글을 쓰게 된 이유가 담임선생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서입니다)
'선생님 한 분의 진심 어린 노력으로 아이가 이렇게도 변할 수도 있구나'를 바로 옆에서 보았습니다.
저 또한 학생을 가르쳤던 교사였던지라 힘들어하는 학생을 1년 동안 꾸준히 이야기를 들어주고 격려해 주고 때론 야단도 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를 잘 압니다.
수업 시간 내내 말을 하는 교사는 빈 수업 시간에 충분히 쉬어야만 다음 수업을 무리 없이 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선생님은 수업도 많았음에도 힘들어하는 아이가 찾아올 때마다 이야기를 들어주었습니다. 오죽했으면 교장인 제가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더군다나 이 선생님은 가정사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교사의 상황을 파악하는 교장만 아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출근하면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고 아이를 대했습니다. "내 딸의 담임선생님도 이분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학교에서 이런 선생님을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른 교사는 열정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각자의 성향과 역량으로 아이들을 위해 열정과 사랑을 베풀고 있습니다. 다만 지금 전해드리는 이 선생님이 조금 더 특별했다는 것입니다.
진심(眞心)은 통(通)한다고 했는데 정말 이 학생이 졸업을 앞두고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늘 슬픈 표정, 우울한 표정의 얼굴이었는데 언제부턴가 얼굴에 미소가 생겼고 담임선생님을 매 시간마다 찾아오는 횟수도 두세 번으로 줄었습니다.
압권은 졸업식이었습니다.
어떤 학생이 식전행사로 멋진 리듬으로 디제잉(DJing)을 하면서 분위기를 끌어올리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바로 그 학생이었습니다. 평소의 우울한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고 자신감 넘치는 멋진 모습으로 서 있었습니다.
이 학생이 얼마 전에 작년 담임선생님을 찾아왔습니다.
너무나 멋지고 근사한 청년이 되어서 교무실에 찾아왔는데 선생님들 모두 놀라면서 기뻐했습니다. 물론 담임선생님 한 분의 노력만으로 학생이 이렇게 긍정적으로 변한 것은 아닐 겁니다. 그렇지만 1년 동안 꾸준히 진심으로 학생의 말을 경청해 주고 격려해 주는 선생님 덕분에 이렇게 빨리 좋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집단이든 그 구성원은 매우 다양합니다. 평가를 통해 입사한 대기업의 직원일지라도 능력과 재능, 성정은 천차만별입니다.
학교는 더 심합니다. 아이 한 명 한 명이 지닌 인지적, 정의적, 행동적 특성은 똑같은 게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공부 잘하고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소위 범생이들만 학교에 있는 줄 알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대중매체에서 기뻐서 좋아하는 수능 만점자 모습은 보여도 수능 꼴찌의 낙담하는 모습은 없습니다.
전교 1등이나 반 1등은 기억해도 전교 꼴등은 기억하지(기억나지) 않습니다.
학교는 이렇게 공부만(공부도) 잘하는 아이들만을 위해 존재하는 공공 기관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잘할 아이들에게만 모든 집중이 쏠려있습니다.
학교는,
공부 잘하는 학생도, 공부 못(안)하는 학생도
운동 잘하는 학생도, 운동 못 하는 학생도
말 잘 듣는 얌전한 학생도, 말 잘 안 듣는 까부는 학생도
공교육이라는 제도권 안에 잘 적응하는 학생도, 적응을 잘 못하는 학생도
우리 모두의 귀한 아들과 딸입니다.
관심과 지원이 공부 잘하는 학생에게만, 운동 잘하는 학생에게만, 말 잘 듣는 학생에게만, 학교에 잘 적응하는 학생에게만 집중되면 안 됩니다.
공자는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부모는 부모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맡은 바 본분을 잘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플라톤은 '정치하는 사람들은 지혜를, 나라를 지키는 사람들은 용기를, 생산하는 사람들은 절제가 있어야 국가의 정의가 실현된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 학교에 있는 아들과 딸들은 커서 임금이 될지? 군인이 될지? 정치인이 될지? 근로자가 될지? 아직 모릅니다. 이들이 어른이 돼서 어떤 직을 수행할지 모르지만 자기 직분에 충실하도록 그 직에 필요한 덕을 잘 쌓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학생들을 차별하지 않고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학교, 교사의 존재이유입니다.
제가 몇 년 전 장학사 시험 볼 때 썼던 자기소개서의 맨 마지막 내용입니다.
프랑스 교육자이자 소설가인 다니엘 페낙이 쓴 『학교의 슬픔』이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학생이란 투명한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치는 제비와 같다.
다시 날려 보내면 무리를 따라 잘 날아가는 제비,
또다시 부딪혀 날개가 부러지는 제비,
처음부터 깨어나지 못하는 제비”
교육자는 날개가 부러지는 제비와 깨어나지 못하는 제비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단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고
무한 돌봄과 배움의 길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부적응#학생#교사#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