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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라 Jan 28. 2024

책 이야기

직장생활을 한참 하던 때, 문득 의미 있게 살고 싶다는 열망이 생겼다. 1년 뒤 퇴직하기로 결심했다. 퇴직 전 목표를 하나 세웠다. 책을 내는 것이었다. 그때가 2002년 1월이었다. 노트북을 샀다. 열심히 글을 썼다. 새벽, 저녁, 때와 시간을 가리지 않고 틈만 나면 썼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시절이었다. 


글을 쓰면 쓸수록 욕심이 생겼다. 그 욕심 때문에 퇴직 전에 책을 내지 못했다. 조각 글이 분리수거 쓰레기처럼 쌓였지만 책이 될만한 원고 형태로 묶어내지 못했다. 퇴직 후에도 꾸준히 글을 썼다. 2003년부터 내 원고가 인쇄되어 잡지 같은 곳에 몇 번 실리기도 했다. 2006년에 첫 출판 계약을 했다. 초등학교 고학년 대상의 동화를 쓰는 일이었다. 처음 해보는 동화의 세계는 내 능력을 벗어난 일이었다. 원고는 결국 책이 되지 못했다. 2010년에 첫 책이 나왔다. 이듬해에도 나왔고, 그 이듬해에도 나왔다. 그때부터 욕심병이 도졌다.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대로 담아 정말 멋진 책, 대단한 책을 내고 싶었다. 


해마다 겨울에는 외국의 한 도시에 머물며 집필에 집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글을 쓰는 일보다는, 글을 쓴다는 행위를 만드는 조건에 더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본격적으로 글쓰기를 시작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책을 낼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생각하는 글을 쓸 수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멋진 책을 내려는 욕심 때문이었다. 간극이 커졌고, 그 간극을 줄일 능력이 없었다. 3년이 흐르고, 5년이 흐르고, 10년이 지나니 결과물 없이 흘러간 시간 때문에 더 멋진 글을 쓰고 싶었다. 눈높이와 목표가 올라갈수록 글은 더 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길을 잃었다.


노트, 컴퓨터, 외장하드, 클라우드 등에 쌓인 시작만 했던 글조각들은 이제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다. 도저히 정리가 되지 않는다. 그래도 또 매일매일 메모하듯 글을 쓴다. 이런 세월이 22년째다. 쓰다가 완성하지 못한 원고, 수많은 출판 기획들, 수많은 종류의 조각글들, 자료들, 이제는 도시의 쓰레기 소각장의 세기말적 장면을 보는 듯하다. 그럼에도 어제 저녁에도 오늘 새벽에도 또 글을 썼다. 만년필로 노트에 몇 장 쓰고, 웹사이트에 몇개 메모를 올리고, 스크리버너, 베어, 옵시디언, 율리시즈에 또 글을 쓴다. 출판으로 연결짓지 못하는 기획력과 실행력을 생각하면 오바이트가 날 것 같고, 쓰는 행위 자체만 생각하면 보람된 하루하루다. 


지난 5년 동안 작정하고 천착한 주제가 있다. 생각해보니 2002년 처음 노트북을 샀을 때 쓰고 싶은 주제이기도 하다. 욕심은 그만 부리고, 어떤 식으로든 써내고 완성시켜야겠다. 따져보면 30년은 넘게 고민했던 주제이니 이제는 쓸 수 있겠다 싶다. 줄곧 써왔지만 쓰다가 그만두길 반복했다. 조각 원고는 많이 있지만 재미있고 멋지게 잘 재구성해서 속도감 있게 써내는 것이 관건이다. 독감으로 2주 동안 힘들었던 기간 동안 결심했다. 이번에 어떤 식으로든 원고를 완성하겠다고. 기간은 딱 2달.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운동하고, 새벽에는 글을 쓰기로. 


결심을 하고 나니 설렌다. 어떤 결과물이 될 지 궁금해서가 아니다. 어떤 결과물이 나오든 완성을 시키겠다는 마음 때문이다. 머리로는 잘 안다. 과정이 즐거웠으면 좋겠다. 스스로 빠져들었으면 좋겠다. 바라는 것은 그것뿐이다. 무엇보다 내게 의미가 있었으면 좋겠다. 내게 의미가 있다면 그와 비슷한 의미를 느끼는 낯선 타인이 한 명쯤은 있을 거다. 딱 한 명에만 의미 있다면. 그럼 된 거다. 그걸로 내 삶의 의미는 충분하다. 그러니 이제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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