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과의 대화에는 어른들의 사랑이 필요해요
하루 중 가장 많은 대화를 중학생과 하는데, 중학생과의 대화는 늘 어렵다. 우리 집 중학생이 특히 더 그렇다.
오늘 아침 둘이 차를 타고 피부과에 가던 길이었다.(여드름 치료는 끝이 없다.) 이런저런 대화의 물꼬를 트려는데 또 침묵이 흐른다. 그냥 침묵이 아니라 내 질문 뒤에 오는 침묵이라, 내게는 견디는 시간이 필요했다. '시험공부하느라 힘들지?'가 마음에 걸렸나? 침묵의 시간을 견디며 나는 또 분주히 생각하는 것이다. 뭐가 마음에 안 들었을까. 아예 동떨어진 얘기를 해보자 싶어서, "어제 학교에 어떤 누나 엄마가 오셨어. 그 누나가 아침부터 늦게 왔는데 두 시간 수업하고 조퇴했거든? 근데 엄마가 오셔서 이런저런 얘길 해주셨는데, 친구들이랑 사이가 껄끄러워서 학교에 있기 힘들었대. 친구 관계가 제일 중요하잖아? 땡땡이도 그렇지?" 했더니 그제야 '응' 한다. 그다음으로 '네 친구들은 어때?' 하다못해 '친구들은 건강하지?'(왜 이런 게 생각 났을까.) 같은 질문을 하고 싶었으나 딱히 대답을 기대할 여건이 아닌 듯하여 말았다. 고작 "피부과 끝나고 차 한 잔 하고 들어갈까?"라고 물었더니, "아니, 마스크 때문에......." 한다. 이 말인즉슨, 여드름 치료를 하고 나면 피나 진물이 흐를 때가 있는데, 마르기 전에 마스크를 쓰면 그게 마스크에 묻어 찝찝하니까 바로 집으로 가고 싶다는 얘기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나는 참 대단한 것 같다. 이렇게 숨은 말뜻까지 알아듣는다. 그래도 내가 못 알아듣는 속마음이 훨씬 많을 거다. 가령 '학교 생활은 어때?'하고 물으면 '괜찮아요.' 혹은 침묵으로 대응하는 대답 같은 거.
통화를 나눌 때마다 공감하게 되는 학부모님이 계신다. 물론 학부모님과의 대화는 대체로 공감으로 채워지지만 그분에게는 더욱 강하게 공감한다는 말이다. 이분은 여남 쌍둥이를 키우시는데 우리 반에는 남학생이, 저 끝반에는 여학생이 있고, 나는 이 사실을 학기초 학부모 상담 기간에 처음 알았다. 상담은 주로 하소연으로 이루어졌다. 아들에게는 당최 학교 소식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도 그렇다. 그런데 이 아이의 경우에는 그나마 다행으로 연락통이 있다. 딸의 친한 친구가 우리 반이어서, 아들에 대한 얘기를 딸 친구에게서 전해 들으신다는 거다. "그래도 딸들이 좀 낫죠." 하는데 씁쓸하다. 나에게는 그런 소식통이 없는데. 어쨌거나 아들을 키우는 답답함에 대하여 호소하시면 나도 격하게 공감하게 된다.
우리 아이의 학교에서는 여전히 종이로 인쇄한 가정통신문을 나눠주시는데, 학교로부터 오는 소식을 나는 문자메시지가 아니면 좀처럼 알 수가 없다. 가통(가정통신문)을 받아왔다고 바로바로 전해주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 가통은 내가 직접 아들 가방을 뒤져보아야만 찾을 수 있다. 온전한 형태의 가통을 발견하면 '유레카' 인 것이고, 대체로 까만 가방 속에 깊숙이 처박혀 꼬깃꼬깃한 부채 모양을 한 모습으로 발견되기 마련이다. 그것도 기한은 한참 지난 채로. (쓰면서 반성한다. 더 자주 들여다보아야겠다고.) "가정통신문 받아오면 엄마에게 바로 줘야 해."라고 말해도 대답만 시원하지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얼마 전에도 저 어머님과 통화를 했는데, 용건은 다른 것이었으나 곧이어 어머님의 하소연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아들 딸 모두에 대해 고등학교 진학 희망 조사서를 제출한 걸 모르고 계셨다고 하신다.(우리 이쁜 여학생에게는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일부러 부모님과 상의하라고 금요일에 나눠줬는데 부모님들께 문자라도 보내드렸어야 했나. 어쨌거나 어머님이 원하시는 학교를 알려주시는데 나는 놀라고 말았다. 이 남학생은 내게 그 학교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 저한테는 전혀 그 학교 얘길 안 했어요. 그래도 이번이 최종 희망 조사가 아니니 아직 괜찮아요."하고 말씀드리니까 어머님께서는 "얘가 제가 하는 얘기는 정말 잘 안 들어요." 하신다. 어쩌면 이렇게 나와 같으신지! 오히려 학원 선생님이나 다른 어른들 얘기는 듣는 것 같으니, 아이와 그 학교 진학에 대해 얘기 좀 해주시라고 부탁을 하신다. "맞아요. 아이들이 부모보다 다른 어른들 얘기는 좀 듣는 것 같아요. 제가 얘기 나눠 보겠습니다."하고 통화를 마쳤다.
나도 우리 아이 담임 선생님께 부탁이라도 드릴까 참 망설여진다. 나로서는 아직 선생님 목소리도 못 들어봤는데, 그런 면에서 학교에서 상담주간을 마련하는 것은 좋은 취지가 맞다. 일이 생겼을 때(보통은 부정적인 일) 통화를 나누는 것보다 미리 목소리로나마 인사를 해두면 관계에 좀 더 신뢰가 생기는 듯하다. 물론 담임으로서 반 아이의 모든 학부모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큰 일거리이기는 하다. 그래도 무슨 일이든 통화를 하게 되면 서로 공감할 수 있고, 얼굴 마주 보며 상담을 하면 아이에 대해 더 알게 되는 게 많아지니 플러스면 플러스이지 마이너스가 되는 일은 거의 없-다고 쓰고 싶지만 때로 예의 차리지 않는 부모가 계실 수도 있겠다.
요새 들어 자꾸 이런 생각이 든다. 부모님께서 아이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내가 대신해주면 어떨까. 고작 일 년짜리이지만 늘 같은 사람에게서 듣던 말을 다른 사람의 입에서 듣는다면 그 말에 무게가 더 실리지 않을까. (더 지겨워질 수 있다는 위험성이 있다.) 아이의 학교 선생님이, "땡땡이가 좀 더 바른 자세를 했으면 좋겠어."라든지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면 더 멋있어질 것 같아." 같은 말들을 해주셨으면 좋겠다. 물론 "공부하는 습관을 마련하는 게 좋아."라는 말을 꼭 해주셨으면 싶다.
아들이 잠시 다녀갔다. "엄마, 이렇게 많이 썼어요?"하고 먼저 말을 건네다니! 시험공부 중이기 때문에 이렇게 한 번씩 나에게도 관심을 가져주는구나. 공부하기 싫을 땐 별 것에 다 관심이 생기는 법.
사람은 홀로 살 수 없는 사회적인 동물이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살 수밖에 없다는 말이 이제는 좀 실감이 난다. 내가 잘해서 이만큼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더 알아차리게 되는 것 같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주위 사람들을 믿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아이를 가르치는 선생님들께서 좋은 영향을 줄 거라는 믿음, 나 또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어른이고 싶은 마음. 나에게서 출발한 선한 마음이 타인들을 통과해 또다시 우리 아이에게 이를 것이라는 믿음이 아이를 키우는데 큰 의지가 되어 준다. 2022년 3월 우리 반 아이들과의 만남 전에 마주친 문장이 떠오른다. "모든 사랑은 자기에서 출발해 타인을 경유하고 마침내 우리에게 도착한다"는 김현 시인의 문장. 다시 또 사랑이다. 중학생과의 만남들에 사랑이 깃들길.
@ 제목 사진은 오늘 서랍 정리를 하다가 버릴까 말까 망설이던 콘서트 티켓들. 가장 오래된 것은 내가 중학생 때 서태지와 아이들 콘서트! (나이가 드러나도 할 수 없다.) 나도 중학생이던 때가 있었다. 가장 못난 시절이라고 생각하는데, 아이들의 이 시절을 사랑으로 감싸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