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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희 Sep 19. 2022

정말 나이 들면 철이 들까요

     

    남편은 등이 가려운데 발바닥을 열심히 긁어주는 사람이다. 본인 나름대로 성의를 보이니, 탓할 수도 없다. 하지만 등 가려운 사람에게는 등에도 발바닥에도 별 소용없는 일이다. 이것이 성향에서 왔다면 극과 극인 것에서 온 것이니 누가 더 낫고 못 하다 할 것도 아니고, 옳다 그르다 할 것도 아니다. 하지만 등이 가려워 아쉬운 사람 심정은 오죽하겠나.


 대체로 주변에 남편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 편이다. 어쩌다 그럴 경우가 있으면 내 의도와는 다르게 상대에게 핀잔을 듣기 십상이다. 치명적인 이야기는 노골적으로 내보일 수 없어 속상한 이야기를 속풀이 삼아 하다 보면 남편을 평소 밖에서 아는 이로서는 그럴 수 있는 일이다. 네 남편쯤 되니 너를 아까워하는 것이라고. 위로 삼아 한 말이겠지만 게운 할 리가 없다.


 한편 일방적인 이쪽 이야기이니 상대는 억울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있다. 할 말은 다 있다지 않던가. 하여 예민해서라고 말 듣는 내 쪽에서 그냥 묻어둘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어쩌다 가깝지 않은 이가 지나가듯 속내를 털어놓을 때가 있다. 그럴 경우, 내가 그 맘 다 알아, 그랬겠구나 하며 무조건 그들 입장이 되고 만다. 같은 편이 되어 정말 가엾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여 진정 마음을 다해 다독이고 싶다. 그렇지만 어찌 그 마음이 되고, 그 마음이 된다고 한들 어찌 그 마음을 알겠는가.


 일전에 고운 모습의 직장 후배가 지나가는 말로 살아온 이야기를 하는데 듣고 있자니 혼자 알아야 할 깊숙한 가정 이야기다. 다소 부담스러웠지만 몇 차례 듣다 보니 그 아이 사는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어떻게 견뎠을까. 어떻게 견디고 있을까. 기특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저 아이에게 사는 힘은 어딘가에 있는 사랑이 분명했다.


 그 후에도 아주 가끔 마음이 어수선하면 곁에 와서 이야기한다. 무언가 더 나은 위로를 주어야 할 텐데 아쉬울 때다. 그러다 남편 일로 상심할 때는 더욱 단순하게 일러주어야 한다. 정도의 차이지, 대부분 그렇게 산단다, 남편들은 모두 철이 없어, 다음엔 내 이야기도 들어 봐, 하는데 괜히 뜨끔하다. 아니 왜 이 말을 했지, 어디서부터 무슨 말을 시작하려고.  


 ‘기차 옆자리 이방인 현상’이라는 말이 있다. 요즘은 상상할 수 없지만 혼자 기차를 타거나 고속버스를 타면 옆자리 사람과 간식도 나누고 이야기도 나누며 긴 시간을 같이 가던 시절이 있었다. 밤차가 아닌 다음 대여섯 시간을 무덤덤하게 가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물론 혼자 떠난 외국 여행이라면 지금도 가능하기는 할 것 같다. 영화를 보면 사랑도 하지 않던가.


 그렇게 긴 시간을 보내는 동안 가버리면 그만인 상대에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마음속 말을 쏟아내게 된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시작한 것은 아닐 테지만, 조금씩 이런저런 이야기로부터 속 시원한 이야기까지 조금씩 들어내고 나면 누군가는 내릴 때가 되고 혹은 종착지에 닿게 된다. 예의상 연락처를 묻지도 않지만 휴대폰이 없을 때니 떠나면 그뿐이다. 그러고 나면 낯선 이에게 받은 위로와 함께 후련함이 주는 카타르시스는 훌륭하다. ‘기차 옆자리 이방인 현상’이 주는 효과이다.


 떠나고 나면 그뿐인 관계가 아니라서일까. 그녀의 깊은 속 이야기 이후 둘의 관계는 아주 돈독해졌다. 그러나 내 위로는 크게 위로가 되지 않은 듯했다. 집안사에서 남편 이야기는 가슴이 아팠다. 경제적 여력이 있음에도 지극히 본인만 위하는 것이, 그녀가 어린 나이부터 경제활동에 매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었다.


 이제 이쯤에서 내 이야기를 해야 하나. 위로가 될까.

 출장이 많은 남편은 집 떠나 있는 날들이 많았다. 그런 데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무심한 사람이었다. 반면에 눈앞에 있으면 귀찮을 정도로 앞서 일을 치르는 사람이다. 불뚝성이 있어 그렇다고 다정한 사람도 아니다.


 그러니 아비 없는 자식처럼 대부분 행사나 가족 놀이에는 엄마뿐이었다. 필요할 때는 없는 사람,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사람이었으니 어쩌면 있는 둥 마는 둥 한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무엇보다 남편은 가족보다 사회성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 조금씩 남편은 변하고 있다. 나가 있는 아이들이 오겠다고 하면 며칠 전부터 장을 봐오고 서툰데도 불구하고 음식을 장만해서 그날을 기다린다. 출퇴근을 도우려 하고 꼬박꼬박 잊지 않고 약을 챙겨 주기도 한다. 지나다 생각나면 이런저러한  것을, 물론 상의도 없이 무작정 준비해 온다. 그러면서 혹시 내가 변한 것인지 현관을 들어서 빈집일 경우, 헛헛할 때가 있으니 그런 것도 같다.


 “이제 곧 남편도 변할 거고 너도 조금 변하게 될 거야. 아직 젊잖니. 조금만 기다려봐. 철이 들 거야.”

  “나이 든다고 뭐 철이 들겠어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편하 변해 가는 남편으로부터 그녀도 편안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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