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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모 Jan 03. 2020

이십이십년 첫 낮의 눈

2020년 1월 1일

이십이십년 첫 낮의 눈.     


서른한 살이 되고도 한 낮이 되었다. 일월일일, 첫 낮이 올랐을 때 바닥에는 흰 까페트가 깔려 있었다. 자동차는 흰 커버로 덮였고 나무는 흰 잎을 솟아냈다. 서른 살의 해에는 그렇게 오지 않던 눈이 서른한 살이 되어서야 오다니. 지하철을 타러 가는 나는 하늘이 괜스레 얄미웠다. 작년에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도 아니었고 잿빛하늘의 연속이었다. 눈이 펑펑 왔으면 미세먼지도 같이 씻겨나가 하늘도 맑았을 테고 내가 포도막염을 걸려서 시력 하락을 경험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포도막염으로 왼쪽 눈이 많이 상했다. 매일 반쯤 취한 듯 세상이 흔들흔들 거린다. 이게 다 눈이 오지 않은 탓이다.


나는 눈을 욕망한다. 소복이 쌓인 눈을 뽀드득 뽀드득 밟고 내 신발에 묻었던 흙을 눈에 비비며 자국을 남기는 걸 좋아한다. 한 해의 먼지로 얼룩진 워커에 하얗게 묻은 눈을 세척하듯 닦아내는 것도, 사 년째 입어 따듯하지도 않지만 바람만은 잘 막아주는 나이키 롱패딩의 어깨에 쌓인 눈을 떨어내는 것도, 수건으로 대충 벅벅 문지르며 말린 머리 위에 쌓인 눈을 살랑살랑 흔들어 털어내는 것도 좋다. 겨울눈은 나를 추적추적하고 기름지게 만들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한다. 얼룩진 것 같지만 깨끗하고, 찜찜하면서도 포근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눈이 좋다. 사랑하는 사람 품에서 불편하게 안겨있지만 벗어나기 싫은 그런 느낌말이다.


삼년 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만난 눈길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걷고 걸어도 눈길이 이어졌고 털고 또 털어도 몸에는 눈이 쌓였다. 푸쉬킨의 집이라도 불리는 러시아 문학연구소 정원에 있는 알렉산데르 푸쉬킨 동상의 머리에 눈이 소복히 쌓여 있었다. 짙은 녹색의 푸쉬킨과 하얀 눈 그리고 노란 불빛과 초록 나무가 만드는 분위기는 푸쉬킨이 죽기 직전 안겨 있던 아내 곤차로바의 품을 떠오르게 했다. 아내의 모욕한 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결투를 했다 죽어버린 푸쉬킨은 죽어서도 일 년의 반을 눈의 품에서 머문다.


툭툭 털어내고 희미하게 남은 눈 자국은 어릴 적 교회에서 받는 세례를 떠오르게 한다. 목사님께서 머리에 물을 적시는 느낌이 남은 눈 자국에서 느껴진다. 교회에 충실했던 나는 그때 받은 세례를 잊지 못한다. 신 안에서 다시 태어남과 새로운 존재로의 창조는 자기비난에 빠져 살던 나에게 세례는 자기합리화와 위로였다. 신 안에서 다시 태어남을 의미하는 세례와 연말이 되면 내리는 눈이 오버랩되는 것은 우연히 아닐 것이다. 눈이 내리면 새해가 오니까. 새해가 되면 작년과 다른 시작이니까. 올해에 죄책감을 눈을 털어내면서 떨어낼 수 있으니까. 요즘 들어 눈이 오지 않는다. 작년에도 눈이 별루 오지 않았다. 올해는 어떨는지 모르겠다. 매년 점점 눈이 오는 양이 줄어든다. 지구온난화라든지, 오존파괴라든지 다양한 이유를 들겠지만 나에게는 나이가 먹으면서 안 올뿐이다. 매해 쌓이는 욕망이 커지는 반면 매해 해소되는 죄책감은 줄어들고 있다.


왕십리역에 도착하자, 벌써 눈이 사라졌다. 분명 복정역까지만 해도 눈이 있었는데. 잿빛 아스팔트 바닥에 세워진 자동차들, 사람들은 바삐 어디로 가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약속이 있어서 나왔던 거였지. 지하철에서 눈을 욕망하다가 나온 이유도 까먹었다. 욕망은 가끔 목적을 잃게 만든다. 지금 순간에 집중하게 만들고 ‘지금의 나’와 ‘과거의 나’를 연결하게 만든다. 전체의 이야기에 일부가 아니라 나만의 이야기들을 연결시켜 나만의 공간을 창조한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고 침범해서는 안 되는 그 이야기. 욕망은 나를 구성한다. 

2020년에는 눈이 와야 한다. 더 와야 한다. 내가 욕망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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