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모 Jan 29. 2020

목적 없는 인사

2020년 1월 22일

목적 없는 인사


모임을 가다 정치인 덩어리를 만났다. 평소에는 숙대에서 내렸는데 하필 오늘 서울역에서 내려서 저들을 만나는 것일까. 설날이 다가 오면 보이지도 않던 정치인들이 해변에 갈매기처럼 무엇 하나 주어먹으려고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평소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데, 어디에 숨어 있다가 이제야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있어야 할 곳에 있지는 않았던 것은 분명했다. 보수당은 영남과 부산·경남 지역으로 향하는 경부선이 출발하는 서울역에서,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한 진보당은 호남선이 지나는 용산역에서 정당의 표수를 관리하기 위해서 귀성인사를 진행한다. 매년 반복되는 연례행사지만 올해는 더욱 뉴스거리로 입방에 오르는 걸 보니, 총선이 다가오긴 했나보다.


제 21대 국회의원 선거(이하 총선)가 벌써 백일 안으로 다가오고 있다. 제 20대 총선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국내 여론이 적폐청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에 진보당의 손쉬운 승리로 끝났지만, 사 년이 지난 지금은 보수당과 진보당, 어느 쪽에 확정적인 승리를 내다보기 어렵다. 아마 촛불 집회의 승리로 정치적, 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꿈꾸었던 이들이 더딘 속도로 변화해가는 한국 현실에 느낀 좌절감에서 비롯된 고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나 겨우 사년 만에 한국을 뒤집어 바꾸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도 어리석다. 만일 그랬다면 대한민국은 애초부터 안정적이지 않은 나라였거나, 독립성이 없는 국가였던 것이다. 자연적인 강산이 변하는데도 십년이 필요하다는데, 사람이 짓누르며 쌓아온 한국이 변하는데는 더 오랜 시간이 걸릴 터이다.


이들은 “저희를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보답하겠습니다”라며 고개를 숙이지만 나에게는 그 말이 와닿지 않는다. 금색 보자기에 큰 박스를 열어보니 치약비누 세트가 들어있는 느낌이랄까.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비어, 인사를 하는 사람도 지루하고 받는 사람도 찜찜한 느낌말이다. 목적이 있지만 의미가 없는 인사라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자신의 당이 확실치 않고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들의 표다. 어떻게든 얼굴 더 보여서 좋은 인상을 숨어주기 위함이다. 요즘은 정치인도 성형한다던데, 정치가 언젠간 인기투표로 전락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처럼 목적이 있는 인사는 꺼림칙하다. 나를 자신의 도구로 취급하는 느낌도 들고 손바닥 안에서 춤을 추길 바라는 욕망도 느껴진다. 웃는 입구를 타고 올라 코를 지나고 음흉한 눈동자에 비친 나는 또 다른 모습이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모습인지, 그 사람이 나를 바라보는 모습인지 모르겠지만 일그러진 내가 낯설다. 타인의 욕망에 비틀어진 내가 보인다.


며칠전, 설도 맞이했고 겸사겸사 지인에게 새해 연락을 했다. 몇 년을 인근 거리에서 함께 살며 친하게 지내다가 각자의 생각이 달라 멀어진 지인이었다.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고 더 이상 단 둘이 볼 일이 없을 그런 관계가 되어버린 사이다. 그런 사이임에도 왜 생각났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모르게 지인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설이라 들뜬 마음에 그랬는지, 아니면 어떻게든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전화를 걸고 정신을 차렸다는 것이다. 우려와 달리 원체 부드러운 성격을 갖고 있고 말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었기에 화기애애한 대화가 이어졌다. 그러다 갑자기 지인은 나에게 안수를 받고 바뀐 것이 없냐고 물었다. 새해 안부를 묻다가 무슨 질문인가 싶어 에둘러 피했지만 지인은 계속 물었다. 흐름에도 맞지 않는 질문에 분위기가 싸해지자 지인은 회의 중이라며 전화를 끊었다.


목적 없는 안부가 목적 있는 질문으로 돌아올 일은 당황스럽다. 그 숨겨둔 함의를 파악하기 전에 내가 무슨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까라는 염려가 들기 때문이다. 그 대답이 우리의 관계를 크게 좌지우지 하진 않겠지만 내 대답으로 그 사람이 갖는 틀을 더 견고하게 만드는 일이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주변 사람들에게 내 험담을 하는 일에도 사용될지도 모른다. 그런 불안감을 나는 갖고 싶지 않다. 나는 목적 없는 안부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다. 그저 새해니까.


목적을 이루는 것이 생의 목표인 사회에서 나는 목적 없이 건네는 안부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목적 없음이 무의미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목적 없음이 인간을 솔직하게 대면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욕망으로 사람을 투영하지 않는 것, 욕망으로 사람을 움직이게 만들지 않는 것, 욕망으로 사람을 고정시키지 않는 것, 이 모든 것들이 목적 있음에서 시작된다는 것은 모두가 알 것이다. 물론 나에게도 욕망이 있다. 그냥 살아온 이야기를 묻는 것. 살아있다고 말하는 것. 살아갈 고민을 나누는 것.

이전 09화 믿음과 기대는 다른 문제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