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3일
말재주꾼이 말장난
요즘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이하 신종 코로나)로 온 나라가 소란스럽다. 미세먼지 크기의 입자를 94% 막아낸다는 KF94 마스크는 공장의 생산량보다 사람들의 수요를 못 따라가는 제품이 되었다. 한국 제품을 수백 개씩 사간다는 외국인 관광객들을 위해 수천 개의 재고를 쟁여둔다는 명동에서조차 마스크를 구하는 일은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 그런 상황에도 마스크는 꼭 구해야 하는 생필품이 되었다. 지하철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은 타는 순간부터 내리는 순간까지 눈총을 받고, 공공장소에서 출입 거부를 당하는 일도 생긴다. 물을 마시다 사례라도 걸려 콜록콜록거리면 못 본 꼴이라도 본 사람처럼 경멸하는 눈빛을 감당해야 한다. 기분이 나빠, 사레가 들렸을 뿐이라고 사실대로 말해봤자, 사람들은 자신들의 오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요즘 시국이 그렇잖아 라고 책임을 전가할 뿐 사과 따위 할 줄 모른다. 의심과 증오에도 자신의 좁음을 탓하지 않고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사회는 말 재주꾼들이 만든 말장난에서 비롯된 것이다.
최근 유치원에서는 항공사에서 일하는 부모들에게 자녀를 등원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연락을 돌렸다고 한다. 명분은 다른 아이들에게 전염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좋은 명분이다. 다른 아이들을 위한다는 언제 들어도 좋은 핑계이다. 이런 대책의 맹점은 신종 코로나에 대한 대책의 불이익을 한 가정이 짊어진다는 것이다. 사실 유치원의 권면은 부드러운 제안이 아니라 위협이고 통보이다. 만일 맞벌이하는 부모가 아이를 맡아줄 사람을 구할 수 없어 유치원에 아이를 보낸다면 담당 선생님은 이에 대한 보복은 아닐지라도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낼 수도 있다. 그런 위험을 아는 부모가 아이를 유치원에 보낼 수 있겠는가. 파렴치한 부모는 될 수 있어도, 파렴치한 아이를 만들고 싶지 않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말 재주꾼들은 좋은 명분으로 책임을 회피한다. ‘다른 아이를 위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라는 듣기 좋은 명분은 누구 하나 토를 달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이들이 만들어내는 명분 아래에는 배제와 차별이라는 방법이 숨겨져 있다. 유치원 원장은 다른 아이를 위해 신종 코로나의 위험을 잘 알기에 예방을 열심히 하는 부모의 증상도 없고 아프지 않은 자녀를 눈에서 보이지 않게 함으로 유치원의 안정을 도모한다. 그리고는 다른 학부모들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우리 유치원은 안전합니다. 어떤 위험도 없습니다.’ 그들은 알까, 당신도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배제의 일 순위라는 것을. 누구도 보호해주지 않는 사회는 당신들이 누린 좋은 명분에서 시작된 배제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말 재주꾼들의 또 다른 재주라면 작명 센스가 아닐까. 미디어 매체는 신종 코로나를 우한 폐렴이라고 부른다. 중국의 우한 지역에서 발생한 폐렴의 한 종류인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를 줄여서 우한 폐렴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언뜻 듣기에는 객관적이고 문제가 없어 보이는 작명이지만 신종 코로나 감염에 대한 공포와 예방으로 생기는 생활의 불편함을 겪는 한국인들에게는 이 단어가 내포한 나라에 대한 증오심을 유발한다. 우한 폐렴이란 단어가 오작동하지 않는다면 우한을 다녀온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대책이 강구되는 것이 마땅하지만 이 단어는 중국인들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지하철에서 중국어가 들리면 화들짝 놀라며 옷으로 입을 가리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옆자리 사람들이 일어나 다른 칸으로 옮기는 행태도 간간히 보인다. 사람을 바이러스로 보는 이러한 추태들은 서구 사회가 가한 인종차별에 격렬하게 비난하던 우리나라의 모습과는 사뭇 달라 보인다. 우한 폐렴의 파동이 잠잠해질지라도 우한 폐렴이란 단어를 듣는 다면 우린 모두 중국인의 더러움에서 발생한 폐렴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처럼 말재주꾼의 작명 센스에서 비롯된 혐오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어떤 이유이든 혐오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사람은 위험하거나 피곤할 때 본모습이나 나타난다는 말이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자신의 안전이 위협당할 때 사람은 본모습을 보여준다. 영화 <기생충>에서 점잖던 동익(이선균)이 기택(송강호)네 가족을 멸시하는 말을 할 때는 그들이 동익이 정한 선을 넘을 때뿐이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윤 기사(박근록)를 쫓아내는 과정이다. 선을 넘자 눈에서 사라지게 만든다. 백인을 흑인을 노예로 부릴 때도 백인은 흑인을 동물이라고 여겼다. 사람으로 보지 않은 것이다.
미디어의 말 재주꾼들은 항상 좋은 명분과 멋진 작명 센스를 보여주지만 그들의 속내는 쉽사리 보여주지 않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캐고 캐야지 밝혀지는 진실처럼 그들의 속내는 화려한 언변 깊은 곳에 숨겨져 있다. 정보를 아주 살짝 뒤틀어 만들어낸 전혀 다른 사실을 <백성공주와 난쟁이>의 마녀가 맛있는 독 사과를 건네듯 전한다. 그 독사과를 아름답고 달콤하지만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거짓의 잠으로 깊이 빠져들고 말 것이다. 지금까지 그렇게 자신의 목적을 이뤄온 이들이다. 작금의 사태도 그렇다. 신종 코로나를 이용해 무엇을 노리는지, 누구를 향한 공격적 언어를 선택하는지 지켜보지 않으면 우린 이유도 없이 사람을 보는 법을 잊어버릴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