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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모 Feb 04. 2020

그때그때 떠오르는 문장

2020년 1월 31일

[아 그 문장 있잖아. 그... 그 유명한 문장인데...]


오늘 아침, 글을 쓰다 문장이 떠오르지 않아, 한참을 헤매었다. ‘봄에 관한 문장이었는데, 자연하고 공동체에 관한 그 문장인데...’ 하며 책장을 뒤적거렸다. 이 책도 아니고 저 책도 아니고 그 문장 하나면 글을 완성시키고 기분 좋게 외출 준비를 할 수 있는데 떠오르지 않아 한참을 머뭇거렸다. 어렴풋이 머릿속을 빙빙 돌다 결국엔 책장을 뒤지는 내 모습을 보면서 아 모든 문장을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욕망이 솟아났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문장들을, 그 명언들을 모조리 기억하고 싶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필요할 때마다 머릿속에 자료를 넣어주는 것처럼 내가 본 문장들을 정리해서 머릿속에 넣어두고 싶다. 그때마다 필요한 문장들이 줄줄이 뽑아내는 컴퓨터처럼.


글을 쓰다 보면 문장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똑같은 문장이라도 내 문장보다 다른 사람의 문장을 빌려와 글의 완성도가 높이려는 순간에, 뛰어난 문장을 만들어서 모두에게 주목받고 싶고, 내 작문 실력을 드러내고 싶지만 그럴 자신이 없는 순간에도, ‘유식’해 보이고 싶은 순간에도, 자신만의 개똥철학임이 분명하지만 나만 이런 생각을 하진 않았다고 인정받고 순간에도 그렇다. 그럴 때면 나는 다른 사람의 뛰어난 문장을 훔치는 도둑이 된다. 수천, 수만 문장이 묻힌 책장을 뒤적거리며 책을 고르고, 수천, 수백 문장이 적힌 책에서 단 한 구절을 가져온다. 


예전에 한 작가의 아카이브를 잠시 엿볼 기회가 있었다. 그의 아카이브에는 문장을 수집한 파일이 주제별로 있었다. 책을 읽으며 마음에 든 문장을 수집하는 일은 회사에서 복사 업무와 타이핑 업무처럼 귀찮은 일이지만 어느 누구라도 대타가 가능한 일이다. 그건 단순 ‘복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아둔 문장에 자신의 생각과 책의 맥적을 적바림한 일은 ‘자기만의 업무’이다. 귀찮음을 넘어 수고로운 일이고 저자의 생애를 깊이 끌어안는 일이다. 기록이라는 단어보다 끌어안음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처럼 이런 모방을 계속하다 보면 나만의 문장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희망과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는다는 말처럼 계속된 도둑질로 나태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내 속에서 휘몰아친다. 문장을 훔치는 일은 연예인들의 유행어를 따라 하는 유머처럼 가벼우면서도 작가의 삶을 들여다보고 그 삶의 일부를 훔쳐오는 일처럼 무겁다.


책 한 권을 쓰기 위해 수백 시간 동안 원고를 들여다보며 단어를 선택하고 문장을 가다듬고 독자들을 생각하는 그 기간은 삶을 책에 투영하는 과정이다. 가수이자 작가인 이석원은 자신의 책 <보통의 존재>에서 자신은 평범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고단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보다 음악과 글에서 다름을 나타내지 못한다고 말했다. 나 역시 공감한다. 삶에 대한 우열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삶이 가져다주는 ‘자신’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독서는 작가의 ‘자신’을 대면하는 일이고 문장을 수집하는 일은 작가를 끌어안는 일이다.


그러나 욕망은 가끔 본질보다 앞설 때가 있다. 독서의 참 의미를 외면한 체, 문장을 수집하는 일에 몰두하게 만드는 것이 욕망이다. 명언 한 문장을 첫머리에 적어두고 글을 써 내려가는 스타일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출판사들은 작가가 평소 책을 읽으며 마음에 새긴 문장과 삶의 에피소드를 엮은 에세이집을 쏟아 냈고 작가들도 자신의 아카이브를 뒤져 원고를 뽑아낸다. 그렇게 쓰인 책들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내 책장에도 몇 권이 보인다. 그러나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나는 책을 본 것이 아니라 문장만 훔쳐 왔다. 내 목적은 내용을 보기보다 작가가 모아둔 명언들이었다. 붉은 밑줄로 가득하고 모서리는 매 페이지마다 접혀 있는 책의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노트북에 받아 적었다.


그 기록들은 지금도 노트북에 저장되어 있지만, 실제로 그 문장들은 사용된 적이 없다. 그때그때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필요한 문장들은 내가 한자 한자 꾹꾹 눌러본 책들에서 떠오르지 받아쓰기한 책에서는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 나는 복사기처럼 문장을 복사했을지언정 작가의 삶을 탐닉하진 못했던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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