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29일
위험이 아닌 위험
자신과 다른 존재에게 오랜 시간 위험을 경험한 사람은 위험이 아닌 위험도 위협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는 자신이 겁이 많거나, 예민한 감정과 같이 개인의 문제가 아닌 주변 환경이 만들어 내고 강제로 주입시켜온 프로세스의 문제이다. 그러나 위험이 아닌 위험이 언제 위협으로 바뀔지 모르기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미어캣처럼 주변을 경계하는 것은 오랜 경험의 지혜에서 나온 태도이다.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 사회에서 자신을 지키는 것은 자신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만 반대 입장이 되었을 때, 위험하지 않은 사람이 위협한 사람으로 오해받을 때 느끼는 당혹스러움은 몇 번을 겪어도 빠른 시간 내에 불편한 감정에서 이해의 측면으로 해소되지 않는다. 나의 의도와 다르게 상대방이 나를 매서운 눈초리로 째려볼 때 붙잡고는 내가 멀 잘못했는데 그렇게 보냐며 따지고 싶지만 이제껏 살아오며 당한 위험들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으리라 생각하고 넘어간다. 그럼에도 당혹스럽다. 그 순간을 몇 번을 복기하여도 상황과 행동에서 잘못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그랬다. 우리 동네에는 새로운 도서관이 개관했다. 새로 지은 건물답게 깨끗한 환경과 요즘 사람들이 이용하기 편하도록 테이블 열람실 때문에 주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일층에는 어린 아이와 부모가 애용하도록 어린이 코너가 있고 이층에는 일반인을 위한 도서들이 비치되었다. 그리고 삼층과 사층에는 열람실과 사무실 그리고 휴게실이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삼층으로 올라가 열람실에 들어갔다. 평소에 앉던 자리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 앉아 있었기에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고 그나마 열람실의 구석에 위치해서 열람실 전체가 보이는 4인 테이블 석에 짐을 풀고 있을 때 대각선에는 앉아있는 여자의 표현이 보였다. 아니 보았다가 맞는 말이겠다. 그녀가 나를 보는 게 느껴졌으니, 나를 그녀를 본 것이다.
타인의 존재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각막, 수정체, 유리체 그리고 시신경으로 통하는 정보가 오랜 시간 축척되며 쌓아온 정보와 내면 깊은 곳에서 숙성된 감정이 뒤섞여, 느낌이라는 것을 만들어낸다. ‘~같다’라는 느낌은 불가사의해서 전혀 예상치 못할 것을 맞추거나 뻔한 것도 못 맞추기도 한다. 촉과 오해의 경계에서 외줄다기 하는 것. 그럼에도 느낌을 기반으로 위험을 감지하는 일은 중요하다. 언제 위험이 위협이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는 척을 하더니 다시 고개를 들어 나를 쏘아보았다. 카페에 앉아 있는데 모르는 누군가가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너는 머냐’는 눈빛이었다. 나이가 먹으면 눈으로 하는 말도 읽을 수 있다고 하던데. 진짜로 느껴지네. 반복하길 두세 번. 그러더니 짐을 챙겨서 다른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무엇을 한 느낌?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지만 존재만으로도 위험이 주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 존재가 누군가에게 불편하고 싶지 않다. 나는 빈자리에 앉았을 뿐이다. 기분은 불쾌하지만 그럼에도 안다. 저 사람은 나를 싫어하는 게 아니다. ‘어떤 존재’를 싫어할 뿐이다. 거기다 남자라는 것도 포함될 수 있다. 그간 가부장적 사회가 만들어낸 폭력의 경험이 위험이라는 느낌을 만들어 낸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이런 일들이 종종 벌어진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꼭 통과해야 하는 외진 골목길에서 나는 누구보다 예민해진다. 뒤에도 눈이 달리고 옆에도 눈이 달린 듯 온 주위에 신경을 바짝 세워 사람의 인기척을 감시한다. 운이 나쁘게도 골목에 사람이 있으면, 또 그 사람이 여자면 거리를 최대한 두고 남자면 걷는 속도로 걷는다. 또는 운이 더 나빠서 남자가 나보다 골목에 늦게 들어서면 국정원이라도 따돌리듯 아무렇지도 않은 척 빠르게 골목을 벗어난다. 운이 나쁘지 않은 상황은 골목에 나만 있는 경우다.
이와 비슷하게 지하철 오르막 계단에서 마찬가지다. 앞에 여자가 있으면 고개를 숙이고 올라가게 된다. 괜히 오해받기 싫어서이다. 예전에 계단을 오르다 이상한 눈초리를 받은 적이 있었다. 치마를 입은 여자가 올라가다가 갑자기 돌아보고서 나를 보더니 가방으로 뒤를 가렸다. 생각지도 못했던 대응에 순간 변태로 오인 받았다는 아니꼬움에 그 다음부터는 계단을 오르다 여자가 있으면 고개를 숙여 내 발 앞만 본다. 내 앞에 있는 여자는 다른 수많은 사람들에게 음흉한 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으니 저런 행동이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일들을 우리 사회에 만연한다. 남녀 갈등의 중심은 사실 이 지점이다.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위험에 경계를 갖고 사는 이들과 ‘존재’ 자체로 위험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이 부딪칠 때 한쪽은 ‘느낌’을 너무 예민하게 인식한다고 말하고, 한쪽은 ‘느낌’을 너무 둔감하게 인식한다고 주장한다. 그 어느 쪽이든 사실은 없으리라. 느낌은 말 그대로 들어온 경험과 솟아난 감정이 복합적으로 일어난 개인의 주관이니까.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안전’이란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해답은 있다. 누구에게나 안전하고 싶은 욕망은 있다. 나 역시 안전하고 싶은 욕망이 있고,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안전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위험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이 위험을 경험한 이들의 느낌을 위험스럽게 여기는 것도 자신의 안전이 파괴될까 하는 우려에서 오는 느낌이다. 안전한 일상이 위험한 일상으로 바뀌게 될까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우리 모두가 안전하고 싶은 욕망을 이룰 사회를 만들기 위한 과정이라 여기는 건 어떨까. 이런 갈등이 과정이 지나고 서로의 안전을 위해 만들어갈 사회가 이뤄진다면 나 역시 빠른 걸음으로 골목을 지날 일도 없어질 것이고, 계단에서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인 체 오를 필요도 없어질 것이다. 나는 안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