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5일
상상과 재주
영어 공부는 지루함과 짜증 그리고 놀람과 실망을 모두 느낄 수 있는 외딴 영역이다. 강의를 듣다가 모르는 단어를 노트에 적고 몇 번을 입으로 읊조리고 외웠다고 생각해도 다음 날 기억나지 않는 일이 다반사고, 들리지도 않는 말을 억지로 들으면서 쏟아지는 졸음을 참아내야 한다. 우리말과 어순도 다르고 시제도 복잡한 문법도 줄줄이 외워야 한다. 유학을 준비한답시고 몇 개월을 붙잡고 있던 독어도 한두 달 손을 놓자, 한번도 배우지 않은 것 마냥 머릿속 지우개가 싹 다 지웠다. ‘der des dem den …’ 줄줄 외웠던 것 같은데 이제는 저것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 내가 토익을 시작했다. 대학원을 미국으로 가서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한 준비도 아니고 멋진 외국인 여자 친구를 만들려는 불순한 의도도 아니다. 그저 취업에 필요해서 시작했다. 그 외에 다른 이유 따위는 없다. 한국에서 회사를 다니고 한국인을 만나는 직업이고 한국어를 다루는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외국어 능력이라니. 요즘 토익 점수가 없는 사람을 찾는 일이 더 어렵다고 한다.
이는 한국사회가 글로벌 글로벌을 외치면서 생긴 결과이다. 대학이 갖는 특성이나 전공의 성향은 제쳐두고 일단 사회에서 외치는 글로벌을 따라가기 위해서 졸업 조건에 영어 점수를 명시하는 대학들이 늘어났다. 아마 대부분의 대학들이 전공 이수 학점은 존재해도 전공 평균 점수를 조건을 내건 곳은 거의 없을 것이다. 반면 영어 점수는 필수로 제시한다. 처음 대학들이 졸업 필수조건으로 내건 영어 능력은 학생들이 해외 진출을 위한 과정에서 생긴 부수적인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쟁 사회가 급변하고 더 이상 전공을 살리는 일보다는 기업의 일부 부품으로 전락하는 사회구조가 고착되자 대학들은 생존을 위한 조건으로 영어 능력을 선택했다. 바른 사람을 키워내는 곳이 아니라 좋은 회사를 보내는 훈련소로 변질되었다. 요리사가 가게에 사람을 끌어들이기 위해 음식의 맛을 고민하기 보가 가게 인테리어와 음식 모양에만 신경 쓰는 꼴이다. 주객전도라 말하고 싶다.
학교는 그리스의 어원을 따져도 토론과 논쟁을 통해서 자신의 경계를 허무는 장소였고 학교(學校)의 중국식 어원을 따져도 ‘특정 공간 안에서 자식들 간의 사귐과 배움’을 형상화한 학과 그 자식들이 ‘나무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형상화 한 교의 복합어다. 토론과 논쟁 그리고 사귐은 짧은 시간에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들이 아니다. 한 문제를 두고 짧게 몇 시간, 길게는 몇 년을 놓고 머리 씨름하는 일이다. 단편적으로 최근 슬라보예 지젝과 조던 피터슨이 첨예한 논쟁을 벌인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대한 현실 분석은 120년 동안 펼쳐진 쟁점이다.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세계가 새로운 사회구조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더 오래 지속될 것이고 미래를 위한 논쟁이다. 토론과 논쟁이 사라진 사회는 제자리걸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 토론과 논쟁은 시대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그 상상력은 도전하는 몽상가들을 키워내고 몽상가들은 상상력을 열쇠로 더 나은 사회의 문을 열어낸다. 분명 상상력을 필요치 않는 능력은 고착된 사회에서 앞질러가는 경주마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더 나은 사회로 이끄는 열쇠는 아니다.
해커스 강의를 듣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삼십 명의 사람들 중 책을 보는 사람은 단 한 명이다. 반은 영어를 공부하고 반은 노트북으로 작업을 한다. 나는 몽상가를 꿈꾸지만 현실은 뒤쳐진 경주마라는 사실에 상실감이 몰아치지만 ‘경제’라는 거대한 벽을 보인다. 상상력이 있는 사람을 벽을 돌아갈 재치를 발휘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은 벽을 뛰어넘을 재주를 부린다. 나는 어떤 방법이 적합할까 생각해보지만 그 어느 것도 못할 것이라는 실망을 한다. 나는 상상력이 넘치는 몽상가이고 싶고 능력이 넘치는 재주꾼이고도 싶다. 그 둘을 욕망하기에 나는 무단히 글을 쓴다. 가까이서는 종이로 벽을 가릴 수 없지만 한 발, 두 발, 더 멀리 떨어져서는 종이로 벽을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조금 더 멀리, 더 멀리서 벽을 종이에 담아 본다. 저까짓 것 따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