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늘보의 미래진료소_Day16
1) 갈등의 미래; 경쟁의 미래
지난 시간까지 떠오르는 일자리와 사라지는 일자리에 대해 이야기했다. 기존의 정형화된 일을 하던 직업은 사라질 가능성이 높고, 로봇이 대체하지 못하는 창의적인 일을 하는 직업들은 떠오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저번 시간에도 말했듯, 이는 직업이 어떤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지에 따른 분류일 뿐이다. 직장은 '어떤 일을 하는가' 뿐만 아니라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구와', '왜' 일을 하는가 등의 많은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니 질문을 던져 보도록 하자. 미래엔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구와', '왜' 일을 하는가?
미래엔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구와', '왜' 일을 하는가?
여기서는 앞서 소개했던 린다 그래튼의 '일의 미래'에 등장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려한다. 린다 그래튼은 사람들을 모아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다섯 가지의 축(인구, 기술, 세계화, 사회, 자원)에 대해 분석하고, 이 정보들을 다시 사람들에게 주고, 이 정보를 바탕으로 자신이 살아갈 것으로 생각되는 미래를 개인의 입장에서 시나리오로 써보게 하였다. 비유하자면 주어진 정보를 바탕으로 2045년의 개인의 하루를 일기로 써보는 것이다. 이처럼 일하는 개인의 하루를 써보려 한다. 가상의 개인은 30대 중후반의 '빌'이며, '빌'은 미래에 떠오르는 직업 중 하나인 '디자이너', 그중에서도 '제품 디자이너'다.
2040년 3월의 어느 날 빌의 일상
아침 6시, 빌은 알람 소리에 잠을 깬다. 빌은 5분이라도 더 자려고 하지만 빌의 인공지능 비서는 빌이 자는 동안 들어온 업무 관련 메시지 156건을 간략히 보고한다. 눈을 뜨기가 무섭게 알려온 살인적인 업무량에 빌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일어나 지난밤에 들어온 메시지들을 20분간에 걸쳐 확인한다. 그리고 10분 간에 걸쳐 자신의 가상공간용 아바타를 손 본다. 빌은 3일 전 아바타에게 한 달 월급의 3분의 1에 달하는 고가 브랜드의 멋진 슈트를 사줬다. 빛도 바래지 않는 이 슈트를 보며 잠자리에서 막 일어나 런닝만 걸쳐 입은 빌은 흐뭇해한다. 대부분의 업무를 가상공간에서 처리하는 지금 시대엔 아바타용 비싼 슈트가 직장인에게 필수템이다.
7시 정각이 되자 빌은 가상회의룸에 접속한다. 오늘의 회의 상대는 인도의 중개직 사원이다. 빌은 이 회의를 보며 아침을 먹는다. 물론 회의하며 아침을 먹는 건 비매너적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지구촌을 대상으로 하는 일엔 밤낮이 없듯이, 밥 먹을 시간도 따로 없다. 이 인도 사람도 이렇게 말을 잘하지만 아마 지금 점심을 먹고 있을 것이다.
아침 회의를 시작으로 연이어 회의가 잡혀 있다. 빌은 하나의 회사에만 소속되어 있지 않다. 직접 고용된 회사만 5개이며 일시적, 간접적으로 고용되어 있는 회사는 15개 넘는다. 지금 시대엔 분업이 더 발달하여 업무는 더 쪼개졌고, 월급 또한 더 쪼개졌다. 먹고살려면 최소 3개 이상의 회사에 직접 고용되어야 하며, 5개의 회사에 일시적 고용상태를 늘 유지해야 하는 것이 기본이다. 따라서 하루의 회의는 10건이 기본이다.
빌은 학교에서 의류 디자인을 전공하고, 그중에서도 제품의 원단에 대한 일을 한다. 옷의 주제에 대해 어울리는 원단과 그 원단에 대한 정보 및 판매처를 추천하고 중개한다. 오늘 내로 136벌에 달하는 옷에 대해 원단을 추천해야 한다. 또 하루 자고 나면 그만큼의 옷들이 대기하고 있을 것이다. 요즘 같이 인공지능이 척척 정보를 물어다 주는 세상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빌은 오늘 하루 54명의 디자이너와 판매처 직원들을 아바타로 만났다. 그러나 빌은 사실 그들의 얼굴을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업무를 위해 필요한 건 아바타와 그 아바타의 관리번호뿐, 모든 것이 연결된 세상에선 직접 만날 필요조차 없다. 심지어 놀이공간도 행사 공간도 모두 가상공간에 있다. 사람을 아예 만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마지막으로 사람과 만난 것이 4개월 전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오는 업무에 대해 응대하다 보니 어느새 저녁이 다 지나 밤 10시가 되었다. 아바타를 수면 중으로 돌려두고 정신을 차린다. 집안이 고요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온갖 사람들을 대하느라 정신없었는데 업무를 닫는 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빌은 퍼뜩 자신이 아직도 런닝만 입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하지만 이러기를 벌써 며칠째라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요새 유행하는 초인도전을 시청하다 이내 잠이 든다. 업무에 사용하던 스크린에는 조용히 메시지 수신 알림의 숫자가 하나 둘 올라간다.
빌은 나름대로 떠오르는 직업이라는 디자이너이며, 그중에서도 특화된 영역을 지녔다. 이는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으며 잘 나가는 직장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빌의 일과를 살펴보면 하루 종일 일한다. 극대화된 연결성은 언제 어디서나 빌에게 고객들을 연결시켜준다. 고객은 이제 언제 어디서나 빌에게 주문을 할 수 있고, 클레임도 걸 수 있다. 심지어 빌의 고객들은 전 세계에 걸쳐 있다. 너무 다양한 고객들의 시간에 회의를 맞추다 보니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빡빡한 일정이 만들어졌다. 이 일정을 소화하지 못하면 같은 일을 하는 경쟁자에게 클라이언트들은 넘어가고 도태되고 말 것이다. 그나마 수면시간이 있는 게 이 세계에 몇 남지 않은 배려이다.
빌은 런닝을 입은 채 깨어나서 다시 런닝을 입은 채 잠이 든다. 그러나 그의 아바타는 월급의 3분의 1이나 해당하는 고가 브랜드의 슈트를 입고 있다. 가상현실 기술은 굳이 현실에서 만나지 않아도 되는 연결성을 가져다주었고 사람들은 아바타로 만나기 시작했다. 더 쉽게 구매하고, 더 쉽게 보여지는 온라인 세상에는 슈트 한벌로는 며칠 버티지도 못한다. 더 많은 수의 슈트들과 액세서리뿐만 아니라 쉽게 못하는 염색과 헤어스타일, 심지어 성형까지, 아바타에 투자해야 하는 돈은 너무나도 많다. 어차피 밖에 나갈 일도 없는 빌은 자신은 런닝을 입은 채로 아바타에게 더 많은 돈을 투자한다.
빌은 업무 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그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심지어 옆집 사람도 본 적이 없다. 필요한 건 모두 집안에 있으며 가상공간에 있다. 업무가 끝나기가 무섭게 혼자 있는 상황이 닥쳐와 어색하다. 어색함을 떨쳐버리기 위해 방송을 시청한다. 그 와중에 내일 해야 할 업무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이 업무들은 밤새 누군가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일의 전후 사정과 누구와 같이 일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극도화 된 분업의 세상에선 그저 자기 할 일만 잘하면 될 뿐이다.
물론 빌도 이 생활이 지친다. 그러나 연결성이 극대화된 지구촌 시대가 되면서, 국적불문, 나이불문, 능력만 비슷하면 자신의 경쟁자가 된다. 일에 잠시라도 소홀하면 구직사이트의 평점이 즉각 내려간다. 극도화 된 분업으로 일이 더 세분화된 만큼 일에 대한 보수도 더 세분화되었기에 일정 이상의 수입을 유지하려면 복수의 직장에 동시 고용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평점이 내려가면 현재의 직장들로부터 잘리거나 새로운 직장을 구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빌은 알면서도 이 생활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인류는 이러한 미래를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어떤가? 빌이 행복해 보이는가? 이는 연결성이 극대화되며 일어날 일들의 일부분이다. 만일 기술의 발전이 연결성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것을 포기한다면 이런 미래를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을 막을 수 있을까? 기술을 발전시키는 동인은 인류의 욕망이다. 따라서 기술의 발전 방향을 바꾸려면 인류의 욕망을 제어해야 한다. 따라서 결국 기술은 연결성이 극대화되는 방식으로 나아갈 것이고, 위에서 제시하는 미래가 현실로 다가올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면 인류는 이러한 미래를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이에 답하기 위해 다음 글에서는 또 다른 미래인 '협력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