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 뷔페의 복붙 현상, 그리고 글로벌 트렌드
책 <나는 호텔을 여행한다>에서도 소개했지만, 호텔은 그 도시 최고의 미식을 가장 쉽게(그리고 비싸게) 만날 수 있는 장소다. 미슐랭 가이드가 선정하는 다수의 레스토랑이 호텔에 있다는 사실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나 역시 호텔여행을 하면서 길거리 음식이나 로컬 식당보다 조금 더 넓은 영역의 미식을 경험할 수 있었다. 세계적인 셰프가 자신만의 시각으로 도시를 해석한 창의적인 음식을 꾸준히 접하면서, 좀 더 입체적인 미식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호텔 컨시어지의 수준 높은 로컬 식당 추천이나 예약 대행까지 더해진다면, 금상첨화다. 해외의 경우 푸드 브랜드와의 콜라보도 점차 활발해지고 있는데, 그 방식이나 접근법도 과거와는 같지 않다. 전체적으로 호텔은 이미 숙박시설이라는 단순한 기능에서 벗어나, 지역을 기반으로 한 여행경험을 스스로 만들고 있다. 또 그래야만 하는 시대가 됐다.
그런데, 정작 (국내) 호텔업계는 이렇게 매력적인 포지션을 가지고도 이를 '2019년식 여행상품'으로 포장하는 데는 매우 보수적이고 서툴다. 여전히 거의 모든 호텔이 객실+다이닝 패키지에 일정한 가격을 매겨 판매하고 있으며, 호텔이 제공하는 미식에는 차별점이 보이지 않는다. 해외 셰프 초청, 또는 유명 셰프의 시즈널 메뉴를 기계적으로 홍보하는 SNS 포스팅을 보면, 소비자가 어떤 지점에서 호텔 고유의 매력을 캐치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매년 봄마다 딸기를 위시한 온갖 디저트 뷔페가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프로모션 철이 되면, 고객들은 더 이상 호텔을 기억하지 않는다. '가격 대비 성능'을 숫자로 철저히 비교한 표를 만들어 널리 공유할 뿐이다.
첨언하자면 미식뿐 아니라 기업/브랜드 콜라보도 마찬가지다. 예전에 국내 특급호텔이 아이돌 그룹 테마로 꾸몄다는 객실을 가보고 실소가 터진 적이 있다. 팬클럽 사이트에서도 파는 굿즈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테마룸이라기엔 콘텐츠가 너무도 빈약해서 (오랜 아이돌 리스너이자 팬으로서) 매우 실망했다. 지금의 호텔 소비자는 너무 똑똑해서, 이런 '무늬만 콜라보'에 쉽게 지갑을 열지 않는다. 음악 쪽 이야기는 따로 곧 다루기로 하고.
벌써 사진만 봐도 어느 호텔인지 궁금해지지 않는가? 이 객실의 테마는 무려, '아이스크림'이란다. 외신에서 발견한 기사를 보고 깜짝 놀라서 알아봤더니, 2017년 헬싱키에서 행사 참석차 방문한 적 있는 클라우스 케이 호텔이다. 북유럽에서 '혁신적인 디자인 호텔' 중심지를 꼽자면 개인적으로 헬싱키를 첫 손에 꼽는다. 그중에서도 디자인 트렌드를 이끈 초창기 호텔이 클라우스 케이여서, 디자인이 훌륭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핑크색 테마의 객실이 있었는 지는 긴가민가했는데, 이 객실은 클라우스 케이가 핀란드 유제품 브랜드 발리오(Valio)와 함께 새로 만든 스위트 스위트(Sweet suite)다. 벌써 이름부터 재밌음...
부티크 호텔이 아이스크림 테마의 객실을 만든다? 그다지 특별할 게 없어 보이는 기획이다. 하지만 면면을 뜯어보면 그렇지 않다. 핀란드의 로컬 디자이너들이 직접 디자인한 스위트 룸에는, 역시 현지 브랜드인 발리오 아이스크림으로 꽉 채워진 냉장고가 준비된다. 여기 묵는 것만으로도 벌써 핀란드의 문화 일부를 체험하는 셈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아이스크림을 연상케 하는 Lush의 입욕제, 섬세하게 큐레이션한 스포티파이의 플레이리스트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노래 모음'도 제공된다. 2019년부터는 음악이 호텔을 넘어 여행업계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올해는 이쪽 연구와 칼럼을 중점적으로 이어갈 예정) 그러니 올 가을 핀란드 일정이 생겼다면, 여기는 바로 예약각이다. 핀란드 가는 분들, 달리세요! 단 이 객실은 2019년 10월 1일~12월 31일 사이에만 예약받는다니 주의하시고.
오는 4월 4일, 도쿄 긴자에 일본 최초의 무지 호텔이 드디어 오픈한다. 호텔만이 아니라, 역대 최대 규모의 10층짜리 무지 플래그 스토어에서 6~10층만 무지 호텔이 들어서는 구조다. 중국 선전과 베이징에 이어 도쿄에 3번째로 문을 여는 무지 호텔의 메인 테마는, 현지 언론이 보도한 바에 따르면 놀랍게도 '미식(dining)'이다. 1층에 청과 매장부터 주스 스탠드, 블렌드 티 공방, 베이커리 등 식재료의 시작부터 가공까지의 전 프로세스를 다루는 매장이 자리함으로써, 투숙객이 자연스럽게 로컬 미식을 접하게 한다는 게 핵심이다. 다시 말해, 다른 호텔이 절대로 카피하거나 좇아갈 수 없는 여행경험을 '미식'이라는 키워드로 구현한 것이다. 무인양품이 미식 콘셉트를 하루아침에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그동안 MUJI Diner라는 자체 레스토랑과 서점 등을 통해 자신들이 제안하는 라이프스타일의 가치를 꾸준히 발신해 왔기 때문에, 이런 철학이 자연스럽게 호텔과 결합한 것이다.
이러한 글로벌 트렌드가 몇몇 호텔의 특수한 케이스일까? 대기업이 자본력과 브랜드 파워로 밀어붙여 만들어낸 경험일까? 그렇든 아니든, 2019년의 호텔업계가 이런 변화와 정면승부를 해야 한다는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게다가 자유여행과 OTA예약이 대세가 된 이후로, 여행일정 설계에서 '미식'이 가장 중요한 테마라는 것도 이미 여러 차례 보도된 사실이다. ("한국인 10명중 3명, 맛집 발견이 최고의 여행 추억") 그렇다면 우리 주변의 호텔이 제공하는 미식은 어떤 이미지로 다가올까? 그저 커머스 딜에 싸게 뜨는 뷔페 식사권이나 과일 뷔페가 먼저 떠오르는 건, 썩 개운치는 않다. 미식이라는 좋은 소재를 개성있게 활용하는 호텔을 많이 만나고 싶다는 바람은, 너무 거창한 것일까.
Who is nonie?
국내) 천상 글쓰기보다 말하기가 좋은, 트래블+엔터테이너를 지향하는 여행강사. 기업 및 공공기관, 여행업계 임직원을 대상으로 스마트 여행법 교육 및 최고의 여행지를 선별해 소개합니다. 강사 소개 홈페이지
해외) 호텔 컬럼니스트, 여행 인플루언서. 매년 60일 이상 전 세계 호텔을 여행하고, 전 세계 여행산업 행사를 취재합니다. 2018년 '나는 호텔을 여행한다' 출간. 인스타그램 @nonie21 페이스북 'nonie의 스마트여행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