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움을 나눌 이 없다는 고립감이 가장 힘들었다. 원래 사교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모든 사회적 활동을 끊어내고 방 안에 박혀 있으니 섬에 갇혀 있는 기분이었다.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족들에게는 오히려 티내지 못했다. 누구라도 먼저 불행을 얘기하는 순간 무너지는 둑처럼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매일 아침 "완치, 완치, 완치, 야!" 하는 구호로 부모님과 하루를 시작했다. 그 이면에 있는 우울함을 드러내지 못해서, 기분을 감추는 데 드는 에너지가 컸다. 그러나 오로지 아빠와 엄마만 대면하는, 누구와도 물리적 교류가 없던 그 6개월은 내 우정의 비옥함을 재발견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가족에 매일수록 호혜적인 우정의 세계로 풍덩 뛰어들고 싶은 욕구가 더 커졌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잘 위로하는 방법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내가 받은 위로들을 떠올려보면, 참 그들다웠다. 친구들의 개성만큼 응원의 방식도 기발했다.
가족에 매일수록 호혜적인 우정의 세계로 내달리고 싶은 욕구가 더 커졌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유치원생 아들을 둔 친구 A가 "아들이 편지를 썼다"며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다. 일주일을 기다려 받은 우편물엔 A의 손편지도 들어있었다. 첫 편지는 신변잡기적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답장을 쓰기 시작하면서 어느덧 우리는 6개월째 편지를 주고 받고 있다. 일기 한 자 쓰지 않는 기간에도 그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는 순간만큼은 마음 속을 게워내는 기분이 들었다. 지면 위에 흐르는 마음은 카페서 증발되는 수다보다 여운이 깊었다. A에게 아빠의 투병 소식을 전했을 당시 "네가 무엇이든 말하고 싶을 때 부담없이 연락하라"며 "욕을 해도 좋고 하소연을 해도 좋다"고 건넨 말이 어떤 격려보다 든든했다. 돌이켜보면 A는 그런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통로까지 직접 열어준 셈이었다.
서울에 있는 요즘도 A와 고작 차로 30분 떨어진 거리에 살지만 3장 내외의 손편지가 오간다. 빨간 우체통을 찾아보기 힘들어 2~3주마다 광화문 우체국에 가 일반 우편을 부친다. 퇴근 때마다 우편함을 열어보는 버릇이 생겼다. 결국엔 우리 둘 다 즐거워서 주고받는 편지가 됐지만 누군가에게 주기적으로 나의 일상을 실어보내는 일이 지금 삶이 썩 소모적이지는 않다고 느끼게 해줬다. A는 내가 아빠와 함께 병원에 가는 날마다 "안전운전!" 따위의 메시지도 함께 보내줬다. 나 혼자 특별하게 체크해 놓는 일정에 누군가가 함께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아빠의 항암치료가 중반으로 치달을 무렵 또 다른 친구 B는 내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줬다. 지인과 가는 울릉도 백패킹 일정에 나를 끼워줬다. 또래 사람이 목마르던 내게는 오아시스 같은 이벤트였다. 심지어 그들과 함께한 3박 4일은 생애 최고의 여행이라고 할 정도로 재밌고 새로웠다. 나는 육지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백패킹 장비를 모두 주문해버렸다.
고등학교 시절 단짝이던 B와는 성인이 돼서 1년에 한 번 볼까말까한 사이가 됐다. 울릉도 여행은 우리 관계의 전환점이 됐다. 각자 삶이 치열해 수 년간 격조했지만 원체 죽이 잘 맞는 B와는 그 공백이 무색했다. 이후 B와는 한 달에 한 번씩은 백패킹을 떠나거나 산에 오르고 있다. 텐트를 치고 앉아 자연을 바라보며 B와 나누는 시간은 잠시나마 고달픈 일상에서 나를 꺼내주었다.
'보호자 선배'인 친구들은 아빠를 위한 선물을 보내줬다. 아빠는 친구들이 보내주는 선물을 들고 깜찍한 표정과 함께 인증샷에 응해준다. 어느덧 친구뿐 아니라 그 부모까지 챙겨주는 사이로, 우정의 농도가 짙어짐을 느낀다.
아버지가 우리 아빠와 먼저 같은 암종을 앓았던 친구 C는 주기적으로 자기 아빠의 근황을 전했다. "우리 아빠 내일 친구들하고 캠핑간대!" 같은 말은 나에게도 우리 아빠에게도 희망의 언어였다. C는 눈 앞의 치료에 급급하지 않고 이후의 삶을 상상할 틈을 살며시 열어주었다.
아빠의 항암 기간 중 거의 유일한 나들이었던 울릉도 여행. 추억을 그려 친구에게 선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