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암 진단을 받은 아빠는 올 초 수술을 했고, 8차에 걸친 항암치료 한 사이클을 마쳤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간 줄 모르겠다는 상투적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6개월이었다. 아빠는 자신의 몸과 매일 전투를 치러야 했고, 엄마와 나는 삶의 한 부분을 내어주며 각자 나름의 고단함을 짊어져야했다. 그래도 가족은 더 공고해진 것 같았다.
나는 요즘 허무감에 잘 사로잡힌다. 갑자기 긴장이 풀려서 그런 것인지, 가족 내 막강한 역할 갑옷이 벗겨져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아빠의 치료 과정에서 얼마나 사람들이 정상가족에 집착하는지, 또 그 경로를 벗어나면 불안해하는지를 보고 듣고 겪었다. 간절한 나를 보며 누군가는 “딸 하나는 있어야 한다”고들 했다. 삼키다 목에 켁 걸리는 말이다.
아빠의 급한 치료가 끝나자 가족들은 미뤄놓은 숙제를 하기 시작했다. 동생은 미뤄놨던 결혼 준비에 한창이다. 요즘 가족의 관심은 그런 의례와, 예비 사위의 기특함에 쏠려있는 듯하다. 어쩐지 서글퍼진다. 내 일상을 가동 중지 시켜놓고 아빠의 회복에 매진하고 나니 나는 조금 지쳐있었다. 절박함은 관성이 있어서, 그것을 내려놓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데는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나만 빼고 모두가 정상 경로로 돌아오는 듯한 느낌. 더 나아가 나는 삶이 묶여있고 내 희생을 딛고 동생들은 차근차근 자신의 미래를 준비해나간다는 허탈한 감정이 불쑥 올라올 때가 있다. 물론 아빠를 돌보는 일상도 이제 나의 소중한 삶이 되었고, 나는 멈춰있더라도 동생들은 자기 일에 지장받지 않고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게 내가 바라던 바였다.
현실이 막상 내가 바라던대로 흘러가면 쉽사리 풀리지 않을 억울함이 자리잡을 줄도 어느 정도 예상했었다. 가족의 위기 상황은 내가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괴로움을 줬다. 그러나 뒤에 따라오는 진한 착취감, 결국 이후에도 뒤에서 추적 검사를 따라다니고 각종 항암치료 후유증을 부모님과 함께 견뎌내는 건 3남매 중 나뿐이라는 고립감은 조금 버겁다. 이런 내 감정들도 항암제 부작용이 시간에 쓸리듯 옅어졌으면 좋겠다.
‘워킹도터 이야기’를 연재하며 차마 답을 달지 못한 댓글들이 있다. 가족을 돌보다 종내 자신의 몸과 마음이 상한 여성들의 이야기. 댓글을 남기고 싶어 가입했다는 한 독자는 아빠를 돌보다 보니 엄마와 여동생을 등지게 됐다고 했다. 다른 중년 여성은 암에 걸린 시어른을 6년간 돌봤다. 그 후 십수 년이 지나 그녀는 암환자가 됐다고 했다. 어쩌면 돌봄과 그녀의 암 진단 사이 인과관계는 강하지 않을 수 있다. 중요한 건 보호자 본인이 그렇게 느낀다는 점이었다.
나는 그런 댓글들이 어쩐지 나의 미래처럼 여겨져서 두려웠다. 우리 3남매는 우애가 좋은 편이었다. 아빠를 돌보면서 부모와는 가까워지고 동생들과는 멀어졌다. 그들에게 자꾸만 서운해지고 끝내는 칼날같은 말이 날아갔다. 나에겐 경증 우울이라는 질병이 남았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고 총대도 내 스스로 멨지만, 내 어깨에서 총대를 풀어줄 사람이 없다고 느꼈다. 그래서 누구도 원망할 수 없다가도, 모두가 원망스러워지곤 한다.
* 제목은 김연수 단편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서 차용. 사진은 올해 내 생일, 부모님이 준비한 깜짝 이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