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하게 챙겨보는 TV 프로그램은 ‘나는 솔로’다. 기본적으로 남녀를 모아놓고 짝을 지어주는 연애 프로그램이지만, 다양한 인간 군상을 관찰하는 재미가 있다. 맥주 한 캔 따면서 본방 사수하는 낙을 지키려고 수요일은 일찍 귀가한다. 빌런 출연자가 등장해도 그러려니 하며 보는 편이지만 최근 한 남성 출연자의 태도는 이상하리만큼 불쾌했다. 그는 데이트 자리에서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여자를 선호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고는 굳이 연상인 상대에게 “아직은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있는 나이”라는 평을 붙였다. 결혼하지 않은 채 생물학적 노산(?)에 가까워지고 있는 여성들에 대한 이런 무례한 언사를 한 두 번 보는 것은 아니다. 30대 중반 여성에게 기형아 출산이나 걱정하라는 폭력적 말이 난무하는 시대다.
여자한테 노산 타령하는 건 잔인하고 기이하다. 요즘은 모두가 사회에서 자리를 잡는 시기가 늦어지고 있다. 주변을 보면 만혼과 늦은 출산이 더 보편적이라, 20대에 하는 결혼을 조혼이라고 불러야 할 판이다. 남들과 똑같이 학교 다니고 취업 준비하고 일하며 돈 벌며 살았을 뿐인데 이제 와서 여성에게만 생산력 운운하는 게 다소 기만적으로 느껴진다. 맞벌이가 가정을 이루는 기본값이 된 시대에, 아이도 낳고 커리어도 안정화하는 두 가지 과업을 동시에 해내라고 요구하면서 30대 여성을 노산이라고 조롱하는 건 앞뒤가 안 맞지 않나? 생애주기상 그게 가능한가? 자꾸만 물음표가 생긴다. 여기에 요즘은 난자 동결 시술을 해서라도 생산성을 유지하라는, 기술을 앞세운 폭력적 요구까지 나온다.
노산 타령은 그 여성이 커리어를 일구기 위해 노력한 시간은 눈 감으면서 애는 낳았어야 한다는 이기적인 요구다. 아이가 생기면 많은 가정이 한쪽은 커리어에 전념하고 다른 한쪽은 육아를 주로 맡는 역할 분담이 일어난다. 가정 단위로 보자면 합리적 선택이지만, 후자를 맡는 대다수 여성들은 박탈감을 느낀다. 한 번 유연한 일자리로 돌아가면 다시 고소득의 일자리로 돌아오기 어려운 한국의 경직된 고용시장에서 여성들은 출산이 자신의 커리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굳이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먹어보지 않고도 앞선 세대의 여성들의 삶을 또렷하게 지켜보며 너무 잘 알게 되었다. 아마도 노산 운운하는 그 남성 출연자 언행이 불편했던 건 그 말을 들은 이가 나와 비슷한 나이의, 자신의 커리어를 일궈온 여성이기 때문인 이유도 컸을 게다. 나더러 대체 어쩌라는 건가 싶은 것이다. 열심히 살아온 삶을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여성에게 요구되는 이상형이 점점 도달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른다. 일도 똑부러지게 하고 안정적 직장을 유지하면서 재테크 감각도 갖추되, 애는 잘 낳을 수 있을 정도로 어려야 한다. 예쁜 건 기본이고. 30대에 비슷한 수준의 커리어를 가진 남녀가 있다고 치자. 이때 남성이 노산 운운하는 건 자신은 나이가 들었음에도 아이를 욕망 가능하다는 위치를 드러내는 것이다. 상대에게 박탈감을 안겨줄 수밖에 없다. 현실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다는 얘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 감각은 사회 구조를 읽지 못하는 쪽이 더 떨어지는 게 아닐까?
나는 여전히 아이를 낳는 건 인간에게 큰 행복이라고 믿는다. 지금껏 아이를 낳지 않았다고 해서 아이 있는 삶을 욕망하지 않는 건 아니다. 가정을 꾸려 행복하고자 하는 마음은 육아로 고생하는 친구들이 “넌 절대 낳지마” 한다고 누그러지는 욕망이 아니다. 그런데 이 마음이 우리 사회에서는 너무 쉽게 좌절되고 포기된다고 느낀다. 어쩌면 지금의 아이 없는 상태도 내가 선택했다기보다는 그렇게 떠밀려져 왔다는 의구심이 더 커진다. 20대에 아이를 낳아 기르는 다른 삶의 루트를 상상해본다. 아마도 지금처럼 재미에 추동돼 벌인 많은 일들이 내 삶에서 일어나기는 힘들었을 것 같다.
인구 소멸을 걱정할 수준의 출생율에 모두들 한 마디씩 얹는다. 나는 몇 마디 얹겠다. 한국 사람들은 너무 순응적이다. 소득이 낮은 자신을 탓하거나 남과 비교하는 문화에 화살을 돌린다. 경제적 이유가 주되다면 왜 여성이 고소득일수록 출산에서 멀어지는가. 남과 비교하는 문화가 하루 이틀도 아닌데 출산에서만 이렇게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는 근거는 무엇인가. 이런 이유들은 어느 정도 공감은 가도 정확한 맥을 짚고 있지 않다.
나는 장시간 노동에 힘입어 성장한 민간 기업과 이를 묵인한 정부, 맞벌이는 보편적이지만 맞살림과 맞돌봄은 요원한 가부장적 문화에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다. 혼자 벌어서는 가계가 유지될 수 없으니 부부 둘 다 일터로 나가고 아이는 조부모에 맡겨진다. 가계 전체의 근로 시간이 늘고 임금이 정체되는 동안 그 노동력으로 인한 이득은 누가 가져가는가. 거의 봉사 수준인 육아하는 조부모의 노동력은 결국 기업에서 장시간 일하는 젊은 부부를 뒷바라지 하기 위함이다. 앞으로의 노동 인구 감소로 인한 구인난은 그동안 과실을 가져간 기업들이 자초한 일이 될 것이다.
지금의 저출생 키는 남성보다는 여성이 쥐고 있다. 여성에게 결혼 자체로 인한 커리어 손실은 과거보다 적어졌다(바로 윗세대만 해도 결혼을 하면서 직장을 그만두는 여성이 많았음을 떠올려보라). 그래서 결혼은 해도 애는 안 낳는 선택지가 떠오르는 게 아닐까. 가사와 달리 육아는 부부 중 하나는 ‘항시 대기’가 가능해야 하기에 가사 분업이 과거보다 나아졌다고 해서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아니다. 또 가정 내 성별 역할 경계가 희미해졌다고 한들 애 낳지 말라는 여자인 친구들의 근원적 불만은 대부분 남편의 처참한 육아 참여도에 있다. 아마도 그들의 남편보다 애 키우는 여성의 환멸을 더 잘 이해할 나 같은 여성에게 출산이 굳이 걸어보지 않아도 가시밭길로 느껴지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자발적으로 아이 없는 삶을 선택해 왔다기보다는 아이 있는 삶을 꿈꿀 자유를 빼앗긴 채 살아온 게 아닌지 자꾸만 되묻게 된다. 그래서 노산 어쩌고 하는 소리에 욱 하고 억울한 마음부터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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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 만에 돌아왔습니다. 브런치 연재가 일주일 단위로밖에 설정이 되지 않아 기다린 독자분들도 있으실 것 같아요. 오늘 브런치스토리에서 한 독자님의 응원 구독료가 들어왔다는 알림을 받고 퍼뜩 정신이 들었지 뭐예요. 그냥 보고가실 수도 있지만 기꺼이 글값을 내주시는 분들이 있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일주일마다는 아니더라도 최대한 성실하게 써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