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관계다운 인간관계가 생긴 것은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그 이전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관계라기보다는 누군가와 얽혀있는 삶을 살았다. 더 이전엔 지나치게 격리된 삶을 살았는데, 격리된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누군가를 내 옆에 얽어놓고 눌러 앉히려 했던 시간이 거의 10여 년쯤 된다. 동아줄처럼 붙잡고서 서로 도무지 놓아줄 줄 모르던 그때.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끊임없이 홀로 세상을 살아가고 싶은 욕망만 키워 가던 그때.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아온 시간들. 10년을 그렇게 살다가 홀로서기를 시작하니 그제야 관계다운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격리됐던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내게 무척 힘든 일이다. 물리적 격리는 아니었고 말하자면 정신적인 격리였는데, 나 스스로 나를 가뒀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학교에선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하교 후엔 방 안에 틀어박힌 채 가족들과 밥도 같이 먹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말할 수 없다. 다만 지금 말할 수 있는 건 나의 우울이 아주 오래됐다는 것, 열네 살과 열아홉 살의 어떤 사건으로 인해 나는 점점 더 동굴로 숨어들었다는 것. 그 시절을 지나 스스로를 고립시켰던 시절은 물리적으로도 세상과 분리되었던 시절이었다. 사회생활을 전혀 하지 않고 5~6여 년을 보냈다. 그 이후 아르바이트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에도 내 관계망은 여전히 이전의 궤도 밖으로 뻗어 나갈 수 없었다. 작은 둥지는 안락했지만 괴리와 우울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었다.
내 우울이 오래됐다는 건 약을 먹기 시작하면서부터 알았다. 잠을 잔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라고 처음으로 느꼈기 때문에.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한 건 여섯 살 혹은 그 이전부터였다. 여섯 살 때 잠자리에 들 때면 창문 밖에서 괴물이 들어올 것만 같아서 무서웠다. 그럼 나는 창문 쪽에서 자는 게 나은지 문 쪽에서 자는 게 나은지 늘 고민했고, 늘 결론은 창문 쪽이었다. 도망칠 가능성보다 고통 없이 죽는 편이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생각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중학생 시절 때부터였다. 수면유도제를 잔뜩 사서 울면서 먹기도 했고 고등학생 시절부터는 자해를 시작했다. 서른다섯 살엔 꼭 죽고야 말겠다는 다짐으로 살아가다, 작고 안락한 둥지를 만나면서부터는 그 생각이 차츰 옅어졌다. 그러나 살아나가는 것보다는 그저 어쩔 수 없이 살아있는, 죽음에 가까운 삶을 여전히 살아갔다.
죽음에 대해 가장 끈질기게 생각했던 때는 스물여섯 살 때였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세상이 아니라 내가 이상한 거라고 생각하던 그때. 나의 존재는 세상에 들어맞지 않는 것이었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가 난 괴물 같은 존재로 느껴졌다. 직장에서 매일 마주치는 상사들은 죄다 이 사회에 완벽히 들어맞는 퍼즐 조각들인데 왜 난 이 모양 이 꼴일까. 출퇴근 시간에, 외근 시간에 내 머릿속은 늘 차에 치여 죽어버리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우연히 모 화장품 회사에서 주최한 페미니즘 강연을 듣기 이전까지는. 세상의 부속품이 될 수 없는 자아에 대한 혐오는 세상의 고장 난 부분을 인지함으로써 옅어질 수 있었다. 완벽하고 합리적인 것 같았던 세상은 비합리적이고 불확실한 존재들을 지우고 있었다. 언어로 존재를 명명함으로써 언어 뒤의 살아있는 존재들을 지우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너무나도 비합리적이고 불확실한 존재여서 언어를 발명했다. 언어는 인간의 불확실성을 일정 부분 채워주지만 또한 인간의 불확실성을 잊게 만든다. ‘난 왜 이 모양 이 꼴일까.’ 이 언어 안에 생략된 수많은 말해질 수 없는 것들. 그러나 세상은 언어로 굴러간다. 언어로 굴러가고 구분되며 살아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언어로 된 강연을 통해 언어의 함정에 대해 깨달았다. ‘차이가 차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차별이 차이를 만든다.’ 강연에서 들은 말 중 가장 깊게 새기고 있는 말이다. 언어로 구분된 수많은 존재들 사이에 차별이 생기면 존재간의 차이는 더욱 극대화되고 때로는 없는 차이까지 만들어진다.
나는 자라오면서 아이였던 적이 있다. 나는 여성이다. 나는 비정규직이었고 나는 고졸이었다. 차별의 세상에서 내가 우울할 이유는 충분하다. 이쪽으로 저쪽으로 구분당해지며 나는 구분 안의 ‘나’라는 존재를 잊어버렸다. 언어로는 담기지 않는 나의 불확실성을. 언어로 표현될 수 없기에 나만 알아줄 수 있는 나의 존재를. 우울이란 세상과 괴리된 비언어적 존재의 몸부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자기 안에서 그 존재가 몸부림칠 때 누군가는 음악을 들으며, 누군가는 책을 읽으며 그 존재와 만나고 달래주지만 나는 도무지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나의 존재가 어딘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며 살아있을 뿐이었다. 살아갈 수가 없어서 그저 살아있는 잊힌 나의 존재. 나의 우울은 그렇게 나와 함께 존재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