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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단비 May 19.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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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보인다. 미끄러지는 몸짓은 문틈 사이로 새어 들어온다. 색깔은 파랗다. 푸른 옷자락은 힘없이 흐늘거린다. 형태가 잡힌 마네킹은 여기 없다. 문 밖에 있을 것이다. 나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애를 쓴다. 그러나 그는, 내게로 들어온다.

불쾌한 표정이 보인다. 아니, 끔찍한 표정이. 눈꼬리는 아래로 내려간다. 미간은 깊게 파였다.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한 나는 기어이 눈물을 쏟을 만도 하건만, 그러지 못했다. 결국 나는 나로부터 빠져나간다. 멍한 눈빛은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 햇빛의 날카로운 단면이 눈앞을 베며 지나가는데도.

사실은 닫혀 있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떠올린다. 함께 욱여넣던 지난 시간의 기억을.


"아, 심심해."

말은 터져 나왔다. 그와 그녀는 침대에 나란히 엎어져 있다. 베개에 묻은 볼의 옆면은 귀엽게도 찌그러져 있다. 스펀지 같은 그들. 노란색의 스펀지는 그들만이 아니었다. 일요일 4시의 햇빛 또한 노란색이었으니까.

노란색의 테두리는 뭉개져 있었다. 그녀는 폭신한 수플레 치즈 케이크가 먹고 싶어졌다. 그러나 사실은 명료했다. 그들은 돈이 없다.

"섹스나 할까?"

그녀가 말한다. 생각해보니 둘은 섹스를 안 한 지 20여 일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더운 여름 탓이다. 끈적거리는 몸을 부대낄 만큼 서로의 눈이 가려진 단계는 이미 지났다.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그의 표정이 대답을 대신했다.

"영화나 보자."

그는 입을 뗐다. 그리고 침대 머리맡에 있는 노트북을 켰다. 노트북의 푄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노트북은 곧 뜨거워질 것이다. 그녀는 마우스를 가져간다. 영화를 고르는 건 늘 그녀의 몫이었다. 그와 그녀가 함께 채운 저장공간을 쭉 내려본다. 영화 하나가 그녀의 눈에 띄었다. '팩토리 걸'. 앤디 워홀과 이디 세즈윅의 이야기였다.

그와 그녀는 영화를 꽤 집중해서 보았다. 웃음이 나오는 영화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감정에 젖는 영화도 아니었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을 가차 없이 닫아버린다. 그리고, 이제 시작.


뭐가 시작되냐면, 너와 나의 이야기가 시작되었지. 우리는 이렇게 영화를 보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어. 매일 말이야. 영화는 대부분 두어 시간이면 끝이 나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러닝타임이 따로 없었지. 어떨 때는 다섯 시간이나 이야기가 계속되기도 했어. 그날은 팩토리 걸이라는 영화를 보았지만, 뭘 보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지. 말들의 연속이 우리에겐 더 중요했던 것 같아.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말들을 서로에게 집어넣었어. 그리고 서로의 말들을 꼭꼭 집어삼켰지. 그 무렵의 너와 나는 조금 살이 쪘어. 처음 만난 열아홉 그때보다.

날 먹이고 살린 건 여지없이 너야. 그리고 나는 지금, 살이 꽤 많이 빠졌어. 그날 이후로 말이야.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영화를 보지 않아. 왜냐면, 집어삼키고 집어넣을 말들이 사라졌거든.


말들이 사라진 세계에서 나는 문을 닫는다. 닫힌 문 틈 사이로 푸른 연기가 들어온다. 연기의 모양은 점점 형태를 갖춰간다. 뻔한 모양이다. 굳이 이곳에 내뱉을 필요도 없는 뻔한 형태의 연기. 나는 다시, 나로부터 빠져나간다. 아니, 처음부터 나는 이곳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날 그곳에 나를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잔여물만이 이곳을 맴돌고 있다. 그 잔여물들을 잔인하게도 햇빛이 낱낱이 비추고 있다. 창문이 열려 있는 탓이다. 암막 커튼을 달 돈이 없다면 알루미늄 호일이라도 붙였어야지. 그러나 호일을 사러 가기엔 문 밖은 온통 너로 가득 차 있다. 나는 다시 몸을 움츠린다. 여전히 너는 문 틈으로 새어 들어온다. 색깔은 파랗다. 내뱉을 줄 모르는 나는 온몸으로 너를 거부해보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결국 나는 너를 꼭꼭 집어삼킨다. 말이 아닌 너라는 존재를. 그리고 그제야 나는 깨닫는다. 푸른 연기는 우리가 함께 피운 담배의 연기였다는 것을. 뻔하게도 말이다.


끊임없이 머리를 댕댕 울리던 인풋은 거기에서 끝이 났다. 이제는 모든 것을 내뱉을 시간이다. 나는 책상 앞에 앉는다. 차곡차곡 쌓인 집어삼킨 말들과 너들을 풀어놓으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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