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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손 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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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단비 Jul 05. 2022

2022.07.05 손 풀기

썼다 지운다. 손에 붙지 않는 말들. 글들. 생각들. 느낌들. 색깔들. 수많은 나들. 키보드를 바라본다. 때가 많이 타 있다. 많이 써서가 아니라 자주 청소하지 않아서. 게으른 나는 나를 풀어놓을 시간이 없다. 아니 시간이 없는 게 아니다. 게으른데 시간이 없다니. 마음이 없는 거겠지.

텅 비어버린 마음. 슬픈 글은 이제 적당히만 쓸 거야,라고 다짐했다. 어두운 글은 이제 조금만 쓸 거야. 그렇지만 내 글은 근본적으로 어두운걸. 나는 맑고 밝은 사람 이랬는데, 내 글은 어둡고 진하다. 탁하다고 생각하고 싶진 않다. 어둡고 진한 색이야. 걸쭉하고 진하고 묵직하지.

묵직한 글의 단어, 아니 자음과 모음들은 지구의 중력만큼, 혹은 그보다 더 내려앉아있다. 그만큼 내려가 있는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는 글인 거야. 진흙 속에 빠져본 적이 있는 사람만 읽을 수 있는 글인 거야. 하얀 운동화가 진한 갈색으로 더럽혀져 본 적이 있는 사람만이.

진흙을 묻히고선 어찌할 줄 모르던 나는 그냥 그걸 멋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왜, 멋있잖아. 거칠고 투박하지만, 그렇다고 운동화가 아닌 건 아닌걸. 커피콩 모양의 진흙 자국이 보인다. 흙냄새가 고소하게 나고 있다.

정말 횡설수설이군. 글발이 떨어졌다는 소리를 들었다. 내 글 특유의 긴장감이 없어졌다고. 마음이 편해졌으니까, 글은 나니까. 나를 풀어놓는 일들이니까. 게으른 나는 나를 풀어놓을 마음이 없었다. 꺼내놓기엔 너무나도 고되고 무거운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삶처럼 가벼운 마음들을 품고 있다.

삶처럼 가벼운 마음. 죽음처럼 가볍고도 가벼운 마음들. 이 글은 아무런 색깔도 무게도 느껴지지 않는다. 질감조차 없다. 이런 글이 낯설지만, 꽤 유쾌하고 재미있다. 내가 새겨둔 문장 중 하나는 ‘나도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말자.’. 사람은 한없이 가볍고도 무거우며, 의미로 가득 차 있으나 의미 없는 존재다. 그야말로 그 자체의 모순. 나는 사람을 담고 싶다. 사람을 풀어놓고 싶다.

어느새 페이지를 많이도 채웠다. 손 풀기는 하루에 한 페이지만. 딱 그 정도면 됐다. 삐-소리가 난다. 들리는 대로, 보이는 대로, 맡아지는 대로, 느끼는 대로. 나를 번쩍 들어 올린 너는 나를 좌우로 흔들었지. 다리가 달랑거리는 기분이 아주 좋았어.

횡설수설 좌충우돌 천방지축 우당탕탕. 그리고 모순. 그러니까 나는 인간이야. 제발 날 인간으로 봐달라고 엎드려 빌었던 시간. 그리고 인간이길 포기한 순간. 텅 비어버린 마음. 나. 말들. 글들. 생각들. 느낌들. 색깔들. 총천연색과 단색, 흑백의 시간. 어느 책장에는 그 모든 것들이 여전히 팔리지 않은 채로 꽂혀 있겠지.

이제 끝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 달려가고 있다는 표현은 맞지 않아. 내 심장은 평화로운걸. 심장이 아플 땐 나쁜 기분이 든다. 술을 많이 먹거나, 많이 뛰었을 때. 우린 지난 시간 동안 힘들었어. 근데 이제는 편해졌대. 너도, 나도. 그러나 그 안에 여전히 생동하고 있다는 건 정말로 다행이야.

지금부터는 문단을 끊지 않을 거야. 내친김에띄어쓰기도하지말아볼까. 길고길게이어진시간대로어디가시작인지끝인지알수없는것들사이에서멈칫거리던나는어느날뒤를돌아보았고,그자리엔지난시간이그림자처럼길게늘어져있는데그모든것들이한번에사라지는게아쉬워서보여지는것들과숨겨진것들사이를헤짚다가결국땅에두손이닿고야말았는데,나는땅을엉금엉금기어다니다가어느음표를손에쥐고서는그걸내입에집어넣었고구강기에멈춰있는것처럼맛본음표의맛은조금쌉쌀하고달달한어느초콜릿이었고,반으로똑떼어서너의입에한조각넣어줬는데,너와나의웃는표정은닮아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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