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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형길 Aug 22. 2024

상처는 언어의 암호해독

새벽 4시가 넘으면 눈을 뜬다. 아직은 일어나기에는 이르고, 다시 잠에 들기에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시간, 알 수 없는 마음에 눈이 떠진다.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이 올라온다. 지금 당장이라도 적을 수 있을 것 같은 생생한 악몽이 그려진다. 새벽이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 웅크리고 누워, 너를 생각한다. 먼저 아침을 거스르는 너의 도움을 받는다. 나보다 빠른 세계인 그곳은 진작에 해가 들었다고 한다. 고운 목소리가 들려와 안정감을 느낀다. 세계의 영향을 받고 있는 나를 보아하니, 난 아직 그 세계를 머물지도 떠나지도 못하고 있다. 울컥하는 마음으로 네가 있는 세계를 짐작할 뿐이다. 칠흑 같은 새벽에 눈이 떠지고 자꾸 새벽을 설명하고자 들면, 나는 너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체감할 뿐이다. 거기서 옷을 입고,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일상. 나보다 일찍 나를 시작하는 그런 너를 상상하는 자유로운 의지가 이 안에 있으리라.


모자를 푹 눌러쓰고, 시계를 차고. 어떤 마음이든 간에 닥치는 대로 내게 찾아오는 생각을 적는다. 어떤 생각들은 생각하고 싶지가 않은 나머지 무의적으로 걸러지기도 한다. 분명, 내 머릿속에는 거쳐 가는데. 어떤 점을 더 적어야 하는지는 아는데. 어떤 점을 적지 않아서 힘들어하는지도 아는데. 글로 쓰고 싶지 않아 주저하게 되는 솔직한 심정. 하고 싶지 않거나 힘들고 괴로운 마음이 남아 있다는 것은 그 마음의 실상을 인정하고 싶지가 않아서다.


왜냐하면 상처란 개인의 언어로 해독되는 암호이기도 하는데. 이 과정을 꺼려 하는 이유는 상처를 가지고 있는 나를, 해답을 요구하는 문제지로 바라보는 것이고, 해독보다는 이미 해석한 관성으로 살고 싶지. 앞서 발굴된 나의 기질이라고 믿고 있는 모든 성질들이 정면으로 부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보다 두려운 것은 상처는 반복되고, 상처를 지우는 데에 들이는 시간도 반복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즉, 나라는 사람을 문제라 생각해서 풀어내야 되고, 나라는 사람을 로봇처럼 고쳐내야 되는 그런 허상으로부터 먼저 나를 직면하게 되면, 스위치가 보이는 순간. 상처가 놓인 모든 곳에 불이 켜지게 된다. 그 시작이 가능성이다.


하지만 이 모든 관점의 근원은 인간이기 때문에 나의 세계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들키거나 자각하고 싶지 않은 측면에 있다.


내가 쓰는 언어는 누군가의 언어와 다르고, 개인이 쓰는 언어는 집단에서의 언어와 다르다. 표면적으로 같아 보이지만, 이해한다고는 하지만, 말에서 말로 이어지고 문장에서 문장으로 넘어갈 때. 해석은 더해지고 미묘하게 나의 것으로 받아들여질 때 각자만 아는 암호가 더해진다. 본인만이 풀 수 있는 어떤 언어의 암호가 생성되는 것이다. 언어 해독의 격차가 발생함에 따라 어떤 사람은 그 시간이 오래 걸리고 어떤 사람은 단 번에 풀어버리기도 한다. 이 언어의 암호는 이미 어렸을 적에 암호의 시발점을 알아 습득한 사람과 자신의 암호가 언어인지 숫자인지 모르는, 명확히 그려지지 않는 개개인의 차이도 분명 있어서다.


그렇다고 언어의 해독이 짧거나 길다고 해서 아픔의 차이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내가 선택한 나의 언어를 투영하여 직접 글로 적고 눈으로 보는 것이란 입으로 뱉고, 뱉은 말을 내가 듣게 되는 것과는 또 다른 적나라한 고통을 수반한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최적의 언어로 문장을 만들어 눈으로 보게 되고 듣게 될 때. 보이지 않았던 상처를 언어로 뒤섞어 실체를 그려낼 때. 가장 이해하기 쉬운 범주 안에서 시각적인 말들로 현상을 읊어낼 때. 그 뒤에는 이제껏 풀지 못한 암호를 풀어낸 듯한 관념의 쾌락이 실존하게 된다. 그런즉슨 곪아있던 부분을 터뜨리거나 아픔이 똑 떼어지는, 설명할 수 있는 자극을 경험을 했다고 자부하게 되는 순간. 마음은 차츰 괜찮아진다.


소설가가 소설의 결말을 마무리하듯이 문장에 이끌리어 언어의 이별로써 상처를 완결 짓게 되는 것이다. 또한 언어를 빌리고 도움받아 내 안에 실체를 드러나게 하고. 동시에 소유하려고 갈망하지도 않으면서 나의 세계와 하나가 되는 실존 양식을 경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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