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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연 Jan 09. 2023

가방이 왜 항상 무겁냐고요?

소유하는 기쁨과 소유하지 않는 자유


짐가방은 절대 사절
두 겹으로 껴입은 셔츠
재킷 주머니에 칫솔 하나

필립 한든
<자유로운 여행자의 소지품 목록>
-마르셀 뒤샹의 주말여행
P30



사람이 생활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이 되는 짐의 부피는 어느 정도일까요? 일주일짜리 여행엔 28인치 캐리어가 아닌 헐렁한 백팩 하나여도 충분할 수 있을까요? 외출 시엔 꼭 가방이 필요할까요?


잡지 발행인으로 살아온 저자는 여러 해 동안 40여 명씩이나 되는 인물들의 ‘소박한 여행’과 관련한 목록들을 수집하며 그것에 대해 기록했습니다. 제가 이 책을 접한 건 우연이었어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책에 기록된 인물들은 대부분 소지품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프랑스 미술가 마르셀 뒤샹의 주말여행 준비물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짐가방은 절대 사절했다지요. 매 순간 다다익선으로 살아온 저에게 그의 짐은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서문에서 저자는 한 장 나뭇잎처럼 사는 것의 의미를 묻습니다. 짐 없는 여행, 복잡하지 않고 산만하지 않은 여행은 무엇일지라는 질문도 덧붙이고요.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나뭇잎에 대해 생각했어요. 한번 나무를 벗어나면 절대 본 거주지로 돌아가지 않는 나뭇잎이요. 불안하고 부러웠습니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 불안할 것 같았고,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아 부러웠습니다.


그즈음부터 저는 ‘짐’에 대해 집착하기 시작했어요. 집에 가만히 앉아 제가 소유한 것들을 바라보는 일이 잦아졌어요. 욕심으로 집에 들인 가구, 한 번도 안 쓴 머그 컵, 더는 읽지 않을 책, 3년 동안 옷장에만 있는 옷과 취향을 반영하는 소품까지요. 책의 62쪽에 등장하는 테렌스 신부는 ‘요즘 사람들은 물건 없이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물건은 사람의 영혼을 두려움에 빠트리며 더 가질수록 더 많이 두려워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짐으로부터 자유로운 적 없는 저의 모든 일상을 원망했어요. 단지 책에 적힌 문장 몇 개에 이렇게 깊이 동요하는 이유는 책을 읽기 전부터 알지도 못하는 테렌스 신부의 말에 동의해왔기 때문입니다.


살면서 너무 많은 물건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물건의 부피만큼 나약한 존재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저 스스로 단단하지 못해서 많은 짐을 이고 지고 다녀야 하는 거라고요. 그래서 테렌스 신부의 말에 움찔했어요. 스스로 단단하지 않으니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것도 쉽지 않았지요.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로 마음먹는 일도 시간이 걸렸고, 오래 살아온 익숙한 동네도 여전히 떠나기 싫고요. 사 년간 이직 한번 하지 않은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였을 거예요.


업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겠군요. 이커머스 업계에 종사한지도 어느덧 여섯 해가 넘어갑니다. 이 직군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는 바로 ‘자동화’에요. 비효율적인 정책과 업무를 개선하고, 결국 개발로 이어지도록 조율하는 일이지요. 함께 일하는 개발자는 늘 이렇게 말합니다. 문서가 ‘가벼워야’ 전송이 무탈하고 빠르게 ‘잘’ 되는 거라고요. 그래요. 불필요한 비용과 시간을 쓰지 않도록 간소화에 고민하는 일을 육 년째 해오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니 불필요한 ‘짐’의 무쓸모를 가장 잘 알기도 하지요.


문제는 일상에서의 저는 아날로그를 추구하는 비효율적인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일기는 꼭 손으로 써야 제맛이고, 작고 귀여운 건 손에 넣어야 안심되며, 책은 되도록 종이책으로 읽어야 행복합니다. 잠깐 외출을 할 때도 짐가방은 항상 무겁습니다. 짧은 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요. 가방 안에 대체 뭐가 있냐고요? 나를 위한, 친구를 위한, 우리 모두를 위한 모든 것이 있습니다.


저는 친구가 필요로 할 것 같은 물건을 챙겨 다니기를 좋아합니다. 꼭 그 물건을 꺼내줄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이 오기를 기다려요. 친구에게 필요한 물건을 꺼내주었을 때 기뻐하는 표정을 보는 일도 즐겁고요. 머리끈, 핸드크림, 비타민, 충전기처럼 별거 아닌 물건이라서 더 좋아요. 언제든 필요한 존재가 된 듯한 기분도 들고요.


그럼에도 종종 생각합니다. 짐으로부터 도망쳐야 한다고, 짐 없이 온전히 나 자신으로도 잘 살 수 있고 싶다고요. 성격도 일하듯 간소화할 수 있다면 하고 말입니다. 휴대폰 메모장에 일기를 쓰고, 소품 같은 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이북 리더기로만 독서를 하는, 짐이 적고 공백이 더 많은 집을 상상합니다.


그래서 한 가지 실험을 하기로 했습니다. 여행을 동행할 짐가방의 크기를 간소화해 보기로요. 얼마 큼의 적은 짐으로도 안전하고 안심하며 여행할 수 있는지 나 자신과 실험을 해보는 겁니다. 그때부터 여행을 떠나기 전날 밤 가장 오래 고민하는 건 짐가방을 정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첫 번째 실험은 포항에서 두 밤을 자는 기차여행이었습니다. 갈아입을 옷 한 벌과 잠옷 한 벌을 챙겼어요. 여행에 관한 책 두 권과 일기장도 넣었습니다. 세면도구까지 챙기니 가방은 금세 부풀었어요. 백팩 하나에 모든 짐을 넣고 출발하는 것까진 성공했는데, 돌아올 땐 그러지 못했습니다. 가방의 크기를 잊고 서점에서 책을 왕창 사는 바람에 에코백 하나가 추가되었었거든요.


두 번째 실험은 두 밤 짜리 제주도 여행이었어요. 마찬가지로 백팩 하나에 잠옷 한 벌, 운동복 한 벌, 소설책 한 권, 일기장과 세면도구를 챙겼습니다. 이번엔 성공했습니다. 단출한 짐가방 하나로 불편함 없이 다녀온 제 자신이 기특했습니다. 백팩이 너무 빵빵했다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요.


세 번째 실험은 한 밤 짜리 전주 버스여행이었습니다. 그 여행은 떠나기 전날 밤 급하게 결정하게 된 일정이었어요. 이번엔 갈아입을 옷 없이 출발했습니다. 입고 온 옷을 입고 자고, 돌아올 때도 그 옷을 입고 있었어요. 조금 불편했지만 괜찮았습니다. 무엇보다 짐이 적으니 홀가분했어요. 비로소 백팩이 헐렁해졌습니다. 적은 짐만큼이나 자유로운 기분을 동력 삼아 갈아입을 옷 한 벌 없이도 떠나올 수 있다는 사실 꼭 기억하기로 했습니다.


여러 번의 실험을 하면서 알게 되었어요. 물건을 적게 소유하는 사람은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요. 지금까지의 저는 떠나는 사람의 마음을 붙들어 매려고 노력하며 살아온 사람이라는 것도요. 항상 많은 짐을 가지고 다녔던 건 상대에게 떠나지 않을 거라는 안심을 주기 위해서였던 겁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모두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이 자라났었나 봐요. 물건의 부피가 진심을 증명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애정하는 마음이 클수록 상대가 적은 짐을 들고 나오면 자주 서운했었나 봐요. 꼭 언제든 저를 떠날 준비가 되어있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언제쯤 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한 장 나뭇잎처럼 오롯이 저 자신이 되는 게 왜 이렇게 겁이 나는 걸까요?


그래서 서문을 다시 읽었습니다. 처음 읽을 때와 달리 그제야 마음에 들어오는 문장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물질을 소유하면 기쁨을 얻는다.
또 우리는 물질로부터 자유로워지면
기쁨을 얻는다.
이 두 가지 모순되는 기쁨 사이에서
우리는 삶을 춤추어야 한다.

필립 한든
<자유로운 여행자의 소지품 목록>
p17


어떤 쪽이 옳은지는 모르겠어요. 그래서 양쪽의 기쁨을 누리기로 했습니다. 소유하는 기쁨과 소유하지 않는 자유를 느슨하게 허락하기로요. 자유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고 자유로워지고 싶을 땐 헐렁한 백팩을 꾸리기로요. 그러면 꼭 단 한 장의 나뭇잎이 되지 않아도 두렵지 않을 것 같다고 믿어보려고요.




지난해 영도의 커피숍 테라스에 앉아 그린 내가 가진 짐가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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