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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dA Jun 28. 2020

깡통같은

드라마보다가 갑자기 자아성찰한 이야기

    조금 신기하고 조금 웃겼달까. 

    ‘약속, 코 푼 휴지 같은 것. 용도를 다하고 나서는 쓰레기통에 버려야할 것. 부모가 낡고 오래되어 쓰임을 다하면 자식이 부모를 버리고, 예쁜 짓 하지 않는 자식은 쓸모가 없으니 부모가 버리고. 그만큼 허약한게 약속이고 쓸모가 없으면 버리는게 인지상정 아닌가.’ 

라고 말하는 주인공의 대사에 전혀 위화감이 안 들었다. 도덕적이진 않지만, 그게 세간에서 말하는 윤리와 부합하지는 않지만, 까놓고 보면 그게 현실이잖아. 버림받을 수도 있고 그러니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어느 세상에서나 예외가 존재하니까, 그거에 부합하지 않고 마냥 행복하고 화목할 수도 있고. 그냥 그렇게 윙글윙글 돌아가는거 아닌가. 뭐가 나빠? 왜 당신은 그걸 듣고 화내는거지? 어느 핀트에서 화가 난거야? 저 말의 어딘가가 걸려서 화가 난거야? 왜 그래, 어? 왜 그러는데. 내가 잘못한거야? 그럼 안할게. 내가 틀렸다고는 생각 안하는데, 너가 싫다고 하면 내가 안할게. 응? 화내지 말고 말해줘. 


그 대화의 양상이 나와 누군가의 것과 닮아 있었다.

드라마 속 주인공이 다음날 좋아하는 사람을 찾아가서 말한다. 

    ‘내가 약속을 어겼다고 그 사람이 불같이 화를 내서. 약속 지키고 화를 좀 풀어주려고 왔어.’ 

    그냥 그 마음을 통째로 이해했다. ‘내가 틀린 건 아닌데, 그 사람이 틀렸다고 하니까, 그래서 그 사람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래서 왔어!’라는 그 마음. 그냥 그 어리고 미숙하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미움받기 싫어서 무작정 굽히게 되는 그 마음.  


    ‘내가 잘못했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너가 말해주면 고칠게, 내가 해볼게.’라고 나는 종종 말하고는 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걸 묻는 거부터가 잘못된 거라고, 그런건 묻는게 아니고 스스로 좀 유추를 해내야 한다고 말했다. 내 나름의 답을 하려고 보면 또 그게 오답이라는 것처럼 말한다. 모르는 것을 물어보는건데 이게 왜 나빠? 왜 내 답은 항상 오답이라고 말해? 그럼 너가 좀 알려주면 안돼?      


    그 모든 걸 하나씩 짚어 알려주는 과정이 고통의 되새김질 같은거라 그런건 하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 걱정을 한다. 도무지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것인지 잘 모를 정도로. 그 사람은 자기가 내 사회화를 담당했다고 말한다. 틀린 것도 아닌게, 내 가장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을 최전방에서 보고 느끼고 피드백 해주었으니 난 딱히 정정할 수도 없다.      


    드라마 속에서 주인공에게 그의 좋아하는 사람은 말한다. ‘넌 아무 것도 모르잖아. 사실 아무것도 느끼고 있지 않잖아. 근데 왜 그렇게 행동해? 넌 속에 든 건 없고 행동과 소리만 큰거야. 깡통 같이. 넌 죽을 때까지 나 몰라.’


    아니 무슨 당연한 소리를 그렇게 상처되게 하냐. 당연히 나는 당신을 모른다. 우린 타자니까. 내가 당신이 아니고 당신이 내가 아니니까, 난 당신을 모르고 당신도 나를 모른다. 그 뻔한 말을 왜 굳이 그렇게 난 깡통이니까 모른다는 것처럼 말하냔 말이다. 속이 텅 비어있는게 어때서, 비어있으면 누굴 좋아하지도 못하나? 당신이 채워줄 수도 있잖아. 채워달란 것도 아니고 그냥 비어있는건데, 그렇게 생겨먹은건데. 그럼 진정성이 떨어지나? 어렵다. 그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사이코’라고 묘사가 되는데 그래서 마냥 웃을 수가 없다. 내가 주인공의 사고에 공감을 많이 하기 때문에 그럼 나도 사이코인건가, 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기 때문. 마침 나의 친구로부터 ‘사이코패스 아니냐는’라는 말도 들어보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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