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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nergist Jul 25. 2020

뉴질랜드의 여름만큼만 삶이 아름답다면

크롬웰 빈야드에서의 여름 즐기기



날씨가 조금씩 따뜻해짐과 동시에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뀌기 시작했다. 예측 불가능한 뉴질랜드 날씨 하루 이틀 겪는 것도 아니긴 하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예보를 확인하는데 시시각각 바뀌는 아이폰 날씨 탭을 보면 신기하기만 하다. 살이 타 들어갈 정도로 더웠다가 갑자기 선선한 바람이 불고, 급격히 어두워지면서 소나기를 뿌리다가도 다시 해가 난다.


닭과 함께 비 피하기


아침에 잡초제거를 하다 이슬에 운동화가 다 젖었길래 쉬는 시간에 부츠로 갈아 신었더니 해가 뜨겁게 내리쬐서 검은 부츠를 데운다. 이러다 쪄 죽겠어서 점심시간에 맨투맨을 반팔로 갈아입었더니 구름이 끼고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나그네 옷 벗기기 우화를 보는 듯한 크롬웰 날씨. 그래도 저녁에 보온 물주머니와 침낭이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것과, 아침 차창 물기를 닦을 필요 없이 시동을 걸고 출발해도 되는 걸 보면 확실히 따뜻해진 건 맞다. 드디어 뉴질랜드의 여름을 다시 만나게 됐구나!





일하는 동안 햇빛이 내리쬐면 선크림도 무용지물, 2주 만에 다시 브라우니 피부가 됐다. 뉴질랜드에서 1년 생활하며 살 타는 건 이제 포기해서 별로 상관없는데, 피부가 아플 정도로 햇빛이 강한 게 문제다. 나는 대부분의 소지품을 무채색 혹은 네이비로 사는 사람이라 일할 때 빛을 몽땅 흡수해서 지옥에서 온 불타는 노동자가 된다.. 얼굴엔 홍조가 오르고 볕에 노출이 너무 많이 돼서 피부가 아플 지경. 우리가 다들 죽는소리 하면서 덥다 칭얼거리니 매니저가 이건 아직 안 더운 건데.. 라며 땀을 슥 닦는다. 사실 아직 기온이 올라봐야 25도인데 햇볕이 너무 세다 보니.. 대체 한국에서 40도에 육박하는 더위 (+습기)에서는 어떻게 살았지 하는 생각이 든다. 정말 말려 죽일 듯이 더워서, 일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강에 뛰어들어 수영을 하기도 한다. 세상 시원!



아주 더운 날 집에 오는 길에 먹은 아프리콧 아이스크림! 푸케누이에서 사 먹었던 그 베리 아이스크림만큼 맛있다. 뉴질랜드에서 운전하다 가판대에서 파는 real fruits ice-cream 사 먹으면 그냥 백전백승이다. 내가 아이스크림에 사족을 못 써서인 것도 있지만 일단 생과일이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맛도 다양하고 스몰 사이즈가 5불인데 핵 커! 운전하면서 한 십 분 동안 먹었는데도 다 못 먹음.



점점 더워지며 다 같이 쪄 죽기보다는 일찍 일어나기를 선택했다. 삼십 분 일찍 출근하기로 한 것. 아침 다섯 시 반에 해가 뜨니까 뭐 크게 다를 바는 없지만, 힘을 제일 많이 쓰는 아침 잡초제거 때 해가 덜 높은 곳에 있으니 그나마 괜찮다. 그러나 대낮에는 똑같이 볕에 말라가…. 목요일쯤 되면 애들이 지쳐서 서로 대화도 못하고 멍하니 쉬는 시간을 보내다가, 금요일 되면 마지막 날이라고 정신 놓고 떠들곤 한다. 아웃도어 노동자들의 삶이란. (ㅋㅋ)


우리 빈야드에서 나온 포도로 만든 와인들!


금요일 모든 일이 끝나고 헬스 앤 세이프티 미팅 겸 바베큐를 했다! 오너가 일 년을 삼등분해 프랑스와 뉴질랜드 빈야드/홍콩 집에 머무는데, 마침 여기 머무는 기간이라 우리랑 같이 와인파티를 하겠다며 온 것이었다. 머리가 희끗하지만 아주 강단 있어 보이는 할아버지가 오셨는데 멋쟁이 그 자체! 이 빈야드의 여유로움과 즐거운 분위기는 다 저 오너로부터 오는구나 싶을 정도로 아주 편안한 사람이었다. 나는 어른들과의 자리를 굉장히 불편해하는 편이라서 한국에서 일할 때 회식자리나 대학교 다닐 때 교수님과의 식사자리가 아주 고역이었는데, 이 파티는 오너에 빈야드 매니저, 오피스 매니저, 와인메이커까지 나이 지긋한 분들과 함께 하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여유롭고 즐거웠다. 누구 하나 소외되는 사람 없이 하나하나 말을 걸고, 우리도 술이 들어가니까 신나서 이야기하고..


목 잘라서 미안한데 뒤에 내가 숨어있다구


사진을 찍었어야 했는데... 파란 하늘 아래 초록빛 잔디밭 위에 파라솔이 펴진 피크닉 테이블, 나무도마 위에 각종 치즈와 크래커, 와인과 함께 먹을 과일과 올리브, 프렌치들을 배려한 바게트와 다양한 종류의 신선한 샐러드, 그리고 오너가 손수 실어온 바베큐 그릴 위에서 익어가는 뉴질랜드산 소고기와 소세지까지.. 일 끝나고 다 같이 둘러앉아 맥주 한 병씩을 단숨에 들이켜곤 여기서 생산한 와인을 맛봤다. 피노 누아라서 입에 안 맞을 줄 알았는데, 이 빈야드에서 생산하는 종류 2가지에 프랑스에서 생산하는 종도 따로 있고, 거기다 숙성이 오래된 것들도 가져와서 이것저것 다양하게 맛볼 수 있었다. 레드와인 자체를 잘 안 먹는 편이지만 한번 경험 삼아 먹어볼까 싶어서 마셨는데, 같이 마시는 프렌치들이 칭찬할 정도로 좋은 와인이라고 했다. 오너 할아버지가 ‘아 이거 극비사항인데...’ 하면서 오피스 매니저 눈치를 슥 슥 보더니, 곧 호주 총리를 방문할 예정인 뉴질랜드 총리가 이 와인을 선물로 가져간다는 토요일자 보도자료를 자랑스럽게 읊어줬다. 깨방정(ㅋㅋㅋㅋㅋ)


그리고는 우리의 사기진작을 위해 이번 주의 크루를 뽑았다. 이번 주는 5개월째 아주 성실하게 일하면서 아예 워크 비자까지 준비하고 있는 페루 친구! 상품은 요즘 패키지로 나오는 캐드버리 초콜릿 파티 에디션, 빈야드 한구석에서 생산하는 벌꿀, BP 페트롤 이용권과, 플라스틱 트로피와(ㅋㅋㅋㅋㅋ돌려쓰는거라 다음 주에 가져와야 함) 와인 한 병! 체리처럼 성과제가 아니다 보니 어차피 돌아가면서 다 줄 거란 걸 알지만 우리 백팩커들은 평균 나이 27세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처럼 깔깔거리고 손뼉 치고 좋아하고 부러워했다. 단지 여행 머니를 벌기 위해 잠깐 일하고 떠나는 백팩커들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우리를 정말로 가족처럼 친구처럼 공동체의 일원처럼 대하려고 하는 노력이 임원진들에게서 너무 잘 보여서 정말 감사하며 일할 수 있는 곳인 것 같다. 한 집단을 이끌어나갈 때 구성원들이 잘 따라와 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면 진정으로 리더 혹은 윗선에서 먼저 마음을 여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또 한 번 느낀다.



그리고 이 트로피는 몇 주 후 나에게 돌아왔다! 어차피 돌아가면서 주는 거라 한 번은 올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천생 한국인이라 노예처럼 일한 것이 (ㅋㅋㅋㅋㅋㅋㅋ)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Our ‘Seoul’ Sister라니! 저거 매주 발표하는 오퍼레이션 매니저가 이런 방면에 센스가 넘친다. 지난번에는 체코 친구였는데, The Careful ‘Czech’-er라고 적어준 걸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금요일 오후는 항상 15분 일찍 끝나 이번 주의 크루를 발표한 후, 함께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감자칩을 까먹으며 신나게 웃고 떠들다가 돌아오는 걸로 마무리!


파란 하늘 아래


또 다른 주말에는 빈야드에서 일하는 애들이랑 다 같이 호수 옆에서 바베큐를 했다! 정작 사진을 하나도 못 찍었네. 바베큐 한다니까 매니저가 와인 두병 챙겨줘서 다들 신이 났다. 문화가 너무 다른 것이 느껴졌던 게, 바베큐장에서 바로 모이자길래 대체 음식은 언제 사지? 했더니 각자 사는 거더라. 나는 당연히 다 같이 장보고 돈 나눌 거 생각하고 있었음. 개인주의 오지네 (ㅋㅋ) 하고 혼자 먹을 정도의 분량이랑 맥주 한 병만(운전해야 해서) 샀는데 가 보니까 정작 애들은 무슨 응답하라 일화 엄마처럼 바리바리 싸들고 왔길래 화들짝 놀람. 프렌치 애들은 각자 샐러드랑 쿠키 만들어오고, 체코 애들은 크레페랑 과일 준비해오고, 남미 쪽 애들은 볶음밥 만들어왔길래 나도 급하게 캠퍼밴 뒤져서 채소 이것저것 같이 썰어 구웠다. 내가 사간 건 적은 양이긴 했지만 그나마 구성은 빠지지 않아서 잘 나눠 먹기도 했고. 히유. 일하는 애들의 남자 친구들, 크롬웰로 체리 따러 온 친구들까지 다 모여서 북적북적 재미나게 놀았음. 나는 사람 많은 파티 딱 싫어하는 사람인데 그래도 한 달 본 애들이 있으니까 잘 즐길 수 있었다. 시간이 중요한 사람. 차가운 호수에 맥주 다 담가놓고 (여름에 계곡물에 수박 담가놓던 생각났음) 내 블투 스피커로 노래 빵빵 히 틀고, 프리스비 던지기까지 하면서 다섯 시간 동안 잘 놀다가 빠이빠이 함. 다들 술 먹었으나 크롬웰은 경찰이 없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주말마다 한시간씩 산책


팩하우스에서 함께 일하던 친구가 체리 일 인덕션을 하러 와서 함께 저녁을 먹기도 했다. 일자리 연계 호스텔에 묵으면서 일하다가, 오너의 성희롱을 견디다 못해 일을 옮겼고 운 좋게 체리 팩 하우스 일을 구해 크롬웰로 내려온다고 했다. 나도 초반에 헬프 엑스를 하면서 추행에 가까운 경험을 했던 게 생각나 우리는 한참 동안 이러한 위험요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 오너의 전적을 듣자 하니 옐로 피버가 있는 것 같았는데 백인사회에서 동양인+여성으로 사는 것은 성별뿐만 아니라 인종의 문제도 겹쳐 참 골치가 아픈 일이다. 최근 한국에서도 페미니즘 열풍이 거세지고 있고 백래시도 만만치 않아, 장강명 소설가의 ‘한국이 싫어서’가 자연스럽게 머릿속으로 떠오르다가도 한편으로는 어디든 차별로부터 안전한 곳이 없다는 것에 씁쓸하고, 모두가 조금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나아가고 있을 때 함께 목소리를 내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친구 덕분에 즐거운 주말 저녁을 보냈다.




고요한 캠핑장의 아홉시. Deep South Boysenberry 아이스크림은 사랑입니다!


뉴질랜드의 여름은 행복이다. 나의 워홀 처음과 끝이 이렇게 행복한 일자리와 함께라서 아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3월의 푸케누이도 돌이켜보면 참 눈부신 시간이었고, 지금의 크롬웰 빈야드 생활도 즐거운 기억만 계속 쌓이는 중이다. 스트레스도 없고, 걱정거리도 없고. 앞으로의 삶이 뉴질랜드의 여름만큼만 행복하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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