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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nergist Jul 24. 2020

크롬웰 빈야드, 너를 꿀야드라 부르리

새옹지마가 이런 것인가!


사주팔자는 한국에 있을 때만 먹히는 거라고 한다. 정말 영 안 풀리는 몇 년이 있으면 외국으로 가라고 추천하기도 한다는데, 삼재에 아홉수인 내가 뉴질랜드에 와서 이래저래 운 좋게 잘 풀리는 일이 많아 ‘아 그 말도 일리가 있나 보다’ 하던 참에 퀸스타운에서 끔찍했던 일자리를 만나고 도망쳐야 했다.
 
윤식당 첫 시즌이었나, 점심시간의 급박한 손님맞이를 마치고 한숨 돌리던 윤여정 사장님의 말이 떠오른다. “아까는 진짜 끔찍했지. 인생이 그런 거야. 다 죽을 것 같다가 또 살다가 그러잖아.”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지만, 최근 몇 년간 겹쳐오던 불행과 좌절과 절망들로 인해 그 의미의 이해조차도 흐릿해지던 찰나에 꽂혀 한참을 메모에 저장해 두고 매일매일 봤던 글귀였다. 그 글귀가 빛을 발하는 때가 왔다. 끔찍했던 일자리 뒤에는 꿀 같은 일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더라고.





월요일 아침부터 새로운 마음으로 빈야드로 출근했다. 약간 특이한 와이너리인데, 로고에 쓰여 있듯 (One grape, One vision, Two hemisphere) 뉴질랜드에도 있고 프랑스에도 있다. Bio-dynamic 공법을 이용한다고 처음에 매니저가 설명해줬는데 일반 유기농과 약간 다른 것 같다. 먹고 남은 음식물 찌꺼기나 해초로 만든 비료를 주는 등 자연을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는 공법, 계절이나 주기법이 바뀌는 것을 이용해 포도나무를 잘 자라게 한다고 했다. 독특한 철학이 있는 빈야드에서 일하게 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비가 와도 색을 잃지 않는 빈야드


14ha 정도 된다는데 푸케누이 아보카도 농장 55ha (16만 평) 보다가 여기 오니까 1/3도 안 되는 쪼꼬미라서 일꾼이 현저하게 적다. 아보카도 농장에서 4-5명씩 4-5개 팀으로 슈퍼바이저 하나씩 끼고 일했던 것과 달리, 여기는 프랑스, 페루, 아르헨티나, 체코에서 각각 온 워홀러들 그리고 나까지 일곱 명이 전부다. 빈야드 매니저가 하나 있는데 걔도 자기 할 일 하느라 우리 슈퍼바이징 할 시간이 없음.. 여기서 겨울 전부터 일한 애들이 있다 보니 걔네를 주축으로 삼아 일을 배분해 준 후, 아주 가-끔 와서 잘 되고 있는지 확인한다.


끝없이 펼쳐진 포도나무밭


같이 일하는 애들은 다들 너무 젠틀하고 착하다. 어떤 주제가 나오면 토론을 엄청 열심히 한다. 누군가 의견을 말하면 동조하는 사람도 있고 아니라는 사람도 있고. 처음에는 나이대가 좀 있는 (20대 초반 워홀러들이 없다. 독일인이 없어서 그런가 ㅋㅋㅋ) 사람들이라서 그런가 했는데 프렌치들의 영향이 좀 큰 듯. 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프렌치다. 나머지는 그냥 하하호호 끄덕끄덕. 가끔 의견이 셀 때도 있지만 없는 것보단 낫지 않나 싶다. 의견을 제시하고 전개시키는 방식에서 놀랐던 것은 비유나 시적인 표현을 굉장히 많이 쓴다는 점이다. 파도가 밀려와 모래가 점점 쌓이듯 세상이 조금씩 변한다고 이야기하는 걸 보고 우와, 싶었다. 영어로 대화하는 방식을 보면 각 언어 교육과정에서 강조하는 것들 그리고 번역에 따라 달라지는 표현들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주로 쓰는 어휘들이 있듯 프렌치들은 finally를 많이 쓴다든가, 똑같은 ‘사실은’을 말하는 데 누구는 in fact를 많이 쓰고 다른 친구는 actually를 많이 쓰는 것처럼. 그걸 보면서 머릿속에 자기가 익숙한 언어로 정리한 것을 다른 언어로 바꾸어 말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독특한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온 길은 다르지만 우연히도 같은 전공이라 서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은 친구도 있고, 조용하고 묵묵히 일을 열심히 하면서 서로 많이 도와주는 친구도 있다. 마음처럼 잘 안 되는 영어로 말하면서도 깔깔 웃게 해 주는 친구도 있고, 토픽이 생기면 열정적으로 참여하며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는 친구도 있다. 아시안이 나밖에 없어서 아시아에 대한 모든 궁금증은 나에게로 오는데, 예전에 비해서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긴 한 모양인지 대부분 잘 알고 있어서 신기하다. 싸이는 유튜브 천만뷰니 그렇다 치지만 함께 노래 부르는 걸 봤다는 윤하(심지어 한국인인 나도 무슨 곡인지 모르는데)도 안다는 것에 흠칫. 김기덕은 해외에서 상 많이 받았으니 그렇다 치지만 김 씨 표류기와 곡성을 봤다는 것에서도 흠칫. 넷플릭스에 있는 한국 드라마 콘텐츠도 봤다는 친구도 있고.. 페루에서도 요즘 큰 경기장에 사람들이 모여 케이팝 뮤직비디오나 한국 프로그램을 단체 관람하곤 한다는데, 역시 문화콘텐츠의 힘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든다. 


약간 언덕 위에 있으니 저 멀리 탁 트인 강도 보이고 옆 동네 체리 농장도 보인다!


하루에 여덟 시간 일을 하고 중간에 스모코 한번 런치타임 한 번이 있는데, 우리 휴식 몇 분이야?라고 묻자 그런 것 없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정해진 시간 동안 쉬는 게 아니라 다들 먹고 쉬는 속도에 맞추어 적당히 하자는 주의였다. 다들 먹는 속도도 다른 데다 멀리 있는 화장실도 다녀오고 하다 보면 뭐 1, 2분 더 쉬거나 덜 쉰다고 크게 달라지는 점이 없다는 것이다. 


비가 오는 날에는 기본적으로 일을 하지 않지만, 비가 오다 그치면 매니저가 문자를 보내준다. ‘비 그쳤는데 와서 일하고 싶으면 일해~’ 주 5일이 기본이고, 토요일에는 선택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데 풀데이 하프데이 혹은 2시간 이렇게도 일해서 원하는 만큼 시간을 채워 돈을 벌 수 있다. 진짜 기본만 따르고 다 자기 맘대로 하는 빈야드. 세상 칠링 바이브 오진다.. 


날 따라 뛰는 닭과 나뭇가지 사이의 어린 새들
빈야드에 널린 버섯은 따가서 먹어도 됨! 라면에도 넣어먹고 볶음밥에도 넣어먹고


닭 여섯 마리가 한편에서 계란을 낳고 소 두 마리가 한가롭게 풀을 뜯는 이곳. 가끔 농장 매니저나 오피스 매니저가 (관종) 강아지들을 데려오면 고랑 사이를 신나게 뛰어다닌다. 개들이 문 열어주자마자 차에서 미친 듯 뛰어내려오는데, 세상 얼마나 신이 날까. 여기저기 쓰다듬어주는 사람도 많고.. 자연친화적이고 유기농으로 운영되는 빈야드라서 그런지 더욱 편안해 보인다. 빈야드 여기저기에 손바닥만 하게 자란 버섯이나 아스파라거스, 닭들이 낳은 달걀은 우리가 가져가서 먹어도 되는데 단 달걀 껍데기는 도로 가져와야 한다. 바이오다이내믹 공법 중 한 가지가 음식물쓰레기를 이용해 비료를 만드는 것인데, 여기에 이용된다고 했다. 별자리와 달 주기를 이용하는 신기한 과정.. 아직 여리여리한 나무에 새가 둥지를 지어 알을 낳아 놓으면 나무의 성장을 위해 치울 법도 한데, 잠시 내렸다가 가지치기하고 다시 올려놓으면 된다고 할 정도로 모든 생물에 대한 존중이 있는 곳이다. 단 토끼한테는 자비 없음.. 굴을 파 놔서 포도나무 성장을 방해한다고.. 그래서 가끔은 빈야드 여기저기서 총소리가 들린다ㅠ_ㅠ


원래는 자율적으로 일을 마치고 뒷정리를 하고 돌아가서 하루에 매니저를 한번 볼까 말까 하지만, 한 주가 끝난 금요일에는 퇴근할 때쯤 매니저가 시원한 맥주 한 박스를 싣고 인사하러 오기도 한다. 전에는 점심시간에 여기서 생산하는 와인이랑 핑거푸드 이것저것 준비해서 취하도록 마시고 또 일하고 했다는데 (ㅋㅋ) 우리나라로 치자면 막걸리와 함께하는 새참 같은 건가. 


클라이드 근처 댐 물 색 실화?


일 끝나고 캠프사이트에 돌아오면 네시. 열심히 일한 증거로 냄새나는(ㅋㅋ) 양말을 애벌로 빨아 널어놓은 후, 요가매트를 펴놓고 누워 명상을 빙자한 낮잠을 잠깐 즐긴다. 날씨가 오락가락해서 소나기를 맞을 때도 있고, 바람 한 점 없이 땡볕에서 일하느라 살이 익어있을 때도 있지만, 그늘에 요가매트를 깔고 누워 파란 하늘을 보는 오후 시간이 가장 여유롭고 행복하다. 


주말을 이용해 테카포/푸카키 호수에 가고 싶었는데 거기도 비가 온다는 소식에, 근처 알렉산드라와 클라이드로 향했다. 매니저 말로는 어차피 그놈이 그놈이라 크롬웰이랑 비슷하다고 했는데.. 가 보니까 날씨도 좋고 너무 예쁜 마을이야! 마침 봄날 아침이라 물기를 머금은 장미공원에도 가고, 햇살을 피해 그늘에 앉아 피시 앤 칩스도 먹었다. (뉴질랜드에서 식당 잘 안 가는 사람... 그러나 이번 피시 앤 칩스 핵 망했음 노맛이었다) 공원에 앉아 책도 읽고 글도 쓰고. 평화로운 주말. 


여기서의 24시간은 수면 8시간, 노동 8시간 그리고 오롯이 나만을 위한 8시간으로 구성된다. 출퇴근 왔다 갔다에 씻고 밥 먹고 운동하는 시간 약 2시간을 제외하더라도 6시간이 풀로 주어진다. 책도 충분히 여유롭게 읽을 수 있고, 영화는 세 편이나 볼 수 있고, 글도 세 번은 다시 읽어보고 수정해서 쓸 수 있는 시간이다. 똑같은 24시간인데 한국의 시간과 왜 이렇게 다른 건지 의문이 생긴다. 




캠프사이트 옆, 강 따라 조깅하기


일 시작과 동시에 남은 뉴질랜드 체류 기간 동안 그동안 내가 실천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싶어서, 물 1.5L씩 마시기, 매일 저녁 운동하기, 조금씩 자주 먹기, 밀가루 끊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온갖 건강해지는 방법은 다 해보는 중. 일주일 됐을 때부터 몸이 가뿐해진 걸 느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도 안 힘들고, 만성위염을 달고 살던 속도 별로 불편하지 않고. 


그래서 요즘은 도시락을 안 만든다. 밀가루 줄이기를 하면서 하루에 한 끼 점심 도시락은 다양한 재료로 볶음밥을 해 갔었는데, 쌀이 워낙 다르고 내가 4일치씩 대량으로 밥을 하다 보니 밥이 영 차지지 못해서 점심때가 되면 아주 딱딱해진다. 만성위염이고 소화기에 문제가 있어서, 에라 잘됐다 요리도 귀찮았는데 하고 포기했다. 밀가루를 안 먹으니 점심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굉장히 줄어들지만, 과일이나 견과류 등을 조금씩 자주 먹기를 하는 동시에 변화구를 잔뜩 줄 수 있는 메뉴들로 구성해서 끼니를 챙긴다. 혹시 영양소가 부족하진 않을까 하고 칼로리 앱을 깔아 계산을 해 봤는데 하루 권장 칼로리 정도는 먹는 게 확인됐으니 됐어! 30년 가까이 이렇게 음식에 신경 써가면서 산 적이 없는데, 장족의 발전이다.


치팅데이는 라면이나 떡볶이.. 크흡..


하지만 주말 하루는 치팅데이로 밀가루(라면이나 떡볶이…)를 먹는다. 하지만 고작 몇 주도 안 됐는데 식사 후에 더부룩함 때문에 산책이나 조깅을 더 하게 됐다. 뷰가 너무 좋아서 그냥 걷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곳. 요즘은 폼롤러까지 이용해서 요가매트에 드러누워 일어날 생각을 안 함.. 운동 안 하면 몸이 뻐근하고 아주 죽겠다. 스트레칭이라도 해줘야 하루를 마치는 것 같은 느낌.


잘 안 보이지만 손톱 달! 해가 늦게 져서 이게 아홉 시 반인가 그렇다


저녁에는 글을 쓰고 앞으로의 프로젝트를 정리하는데 너무 편안하고 즐겁다. 한국에 돌아가면 이 깨끗한 공기와 저녁시간의 여유로움과 정해진 시간만 일하고 쓸 만큼 벌 수 있는 생활이 그립겠지. 있을 땐 소중함을 모른다고, 즐길 수 있을 때 즐겨놔야 한다.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아, 도착하자마자 먹고 싶은 것들 리스트를 만드는 중이다. (밀가루 줄이기는 어디로..?) 그러다가 우연히 유튜브로 밥블레스유 클립들을 찾아보고 있는데, 먹방과 별개로 참 많은 깨달음을 얻는다. 저 오랜 지기들이 함께 앉아 밥을 먹고 하하호호 웃는 것을 보면서, 행복이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구나 라며 많은 생각들이 시작됐다. 내게 음식은 인생에서 중요하거나 큰 부분이 전혀 아니었지만 여기서 살면서 점점 더 한국음식, 특히 한 식탁에서 사랑하는 가족 친구들과 음식을 나눠 먹는 것에 대한 감사함과 그리움을 느낀다. 음식 솜씨가 별로 없는 데다가, 최근에는 조금씩 자주 먹기를 하면서 완전한 포만감을 느끼기가 어려워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이분들은 하하호호 먹는 와중에도 명언을 남기는데, ‘자기를 믿는 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거다’, ‘스스로 정한 틀에 얽매이지 말자 - 내가 죽어도 못하겠는 것을 해보면서 편견을 깨자’는 등, 산전수전을 겪으며 살아온 지난 인생에서 배운 것들을 공유한다. 알쓸신잡이 그러했듯 이들의 수다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인생 선배들과 함께 술자리를 (술은 입에도 못 대는 분들이지만ㅋㅋ) 하는 기분이 들어서 계속 보게 된다. 비혼 주의자의 관점으로 보는 밥블레스유는 (그녀들이 비혼을 선택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꿈꾸는 삶의 방식을 잘 보여주는 것 같아서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즐겁게 만드는 힘이 있다. 오래오래 친구들과 행복하게 웃으면서 맛있는 음식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  


뉴질랜드 생활을 기분 좋게 마무리하라는 신의 계시인지 행복한 꿀야드에 도착한 것에 감사하며,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게 된다. 



*2018년 블로그 포스팅을 재구성해 브런치로 옮기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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