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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nergist Jul 28. 2020

호수는 하늘을 담(닮)는다

뉴질랜드를 떠나기 전 마지막 캠퍼밴 여행!


크리스마스를 지나 연말을 앞두고 2주간 일한 날보다 휴일을 더 많이 가졌다. 긴 홀리데이를 맞아 크롬웰에 박혀있을 수만은 없고 해서 줄기차게 여행을 다녔다. 곧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니 이게 마지막 캠퍼밴 여행이라 생각하고.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 되었다)




보정 안 한 물과 하늘 색깔.


우리나라에서는 크리스마스에 친구들과 파티를 하는 등 좀 더 집 밖으로 돈다면, 키위들은 가족과 함께 많이 보내는 것 같다. 머물던 캠핑장에도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들이 다수 도착해서 텐트를 치고, 낮에는 호수에 가서 보트를 타고 수영을 하고 놀다가 저녁에 돌아와 바베큐를 해 먹고 맥주를 마시며 늦게까지 수다를 떨다가 자더라.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신나게 소리 지르면서 놀고.. 그 전주까지만 해도 빈야드 워커들도 거의 다 빠져서 휑했던 캠핑장이 아주 떠나가라 시끄러워지니 나는 더욱더 떠날 곳이 필요해졌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기간에는 티마루 방향으로 올라가 테카포와 푸카키 호수에 다녀왔다. 고등학교 때부터 알바를 시작해서 대학교 때도, 그리고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도 단 한번 크리스마스에 넋 놓고 쉬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이렇게 여유로운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 여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에 너무나 행복했던 것 같다. 쉴 새 없이 두 시간 반을 달려 테카포 호수에 도착. 



어떻게 이렇게 물 색이 아름다운지, 여기가 우리나라와 같은 행성이 맞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마치 색보정을 엄청나게 많이 한 사진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 곳. 호숫가를 한참 걷고, 앉아서 구경하고 여유롭게 누워있다가, 마침 근처에 워킹트랙이 있길래 위에 올라가는 동안 땀을 좀 내서 내려오자마자 호수에 뛰어들겠다!라는 생각으로 한 시간을 묵묵히 올라갔다.


왼쪽에 저 남자는 더워 죽겠는데 크리스마스라고 산타 복장하고 있음 (ㅋㅋ)


역시나 위에서 본 테카포 호수는 장관이었다. 지난 2월부터 남섬에 오면 꼭 와야지 와야지 했던 곳이 여기였다. 오클랜드에서 잠시 지냈던 단기플랫에서 만난 커플이 남섬에 내려가면 테카포/푸카키를 꼭! 무조건! 반드시! 가야 한다고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호수가 뭐 호수지, 퀸스타운의 와카티푸에도 굉장히 만족했었기에 엄청난 기대를 하진 않았지만 계속 궁금했다. 이제는 절실히 알겠다. 남섬에 여행 간다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무조건 여기를 가라고 추천할 것이다. 뉴질랜드에 산 지 1년이 다 되어도 여전히 호수 위를 달리는 제트스키는 비현실적이다. 물 색 때문인지 DI 잘 된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도 들고. 



안 그래도 한여름 기온이 높아져서 더운 마당에 등산까지 하니 땀이 범벅이었다. 내려오자마자 호수에 들어가 볼까 싶었는데 내려오는 동안 땀이 다 식어버려서 푸카키로 가기로 결정. 테카포는 워낙 또 관광지라서 사람이 바글바글 하기도 했다. 그러고 생각해보니 그냥 두 호수 다 들어가 볼 것을 괜히 뒤돌아왔네.





크롬웰에서 크라이스트처치 방향으로 달리면 푸카키 호수를 끼고 약 10분 정도 달릴 수 있다. 이제껏 해안도로를 달렸던 것과는 또 확연하게 다른 느낌이었던 것이, 멀리 보이는 눈 덮인 마운트 쿡이 한몫한 것 같다. 나는 산보다는 호수나 바다를 선호해서 뉴질랜드의 그 유명하다는 통가리로/마운트쿡/아서스패스는 갈 생각도 안 했기에, 타우포 스카이다이빙할 때 통가리로를, 호수 배경으로 깔리는 마운트쿡을 이렇게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푸카키 호수 근처에는 날씨가 좋아서 더 그런지 셀프컨테인드 캠퍼밴들이 아주 꽉꽉 자리를 차지하고 있길래, 좀 더 남쪽으로 달려서 댐 근처 한적한 곳에 차를 대고 수영을 했다. 물론 댐 200m 근처에서는 안 되길래 한참 걸어야 했지만 여기 또한 사람의 발길이 많이 닿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고 더욱이 홀리데이 기간이라 혼자 호수를 다 가진 것처럼 수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프리 캠핑하면서 자유를 만끽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똑같은 캠핑장인데 돈 내고 묵는 것과 프리 캠핑은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키친도 없고, 화장실도 오래됐고, 식수도 없을지언정 나는 프리 캠핑사이트가 제일 편안하다. 저녁도 신나게 만들어 먹고 (일 끝나고는 저녁 안 먹는 사람) 운동도 열심히 하고, 하염없이 넋을 놓고 산등성이 너머로 지는 해를 바라보기도 하고, 꼬마전구 불빛에 의지해 책을 읽다가 따뜻한 블랑켓을 덮고 잠드는 저녁. 




연말에는 넬슨에 다녀왔다. 원래 계획은 빈야드 일을 모두 마친 후 웨스트코스트 따라 넬슨 올라가서 여행 마무리하고 다시 크라이스트처치 내려와 차 팔고 돌아가는 거였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일을 한 주 더 하게 돼서 일 끝나고 가면 차 파는 기간이 조금 빡빡하겠다 싶어 긴 홀리데이를 이용해 다녀왔다. 사실 3박 4일로 다녀올 거리는 아니다. 편도 10시간 조금 넘게 운전해야 하는 거리라 거의 하루 반은 운전만 한 거나 다름없고, 따져보니 하루에 500km 이상씩 운전을 했더라. 그것도 아주 험한 웨스트코스트 길을 운전하면서.. 잘 버텨준 리버티에게도 참 고마운 여행이었다. 픽턴에 처음 내려왔을 때 잠시만 틀어 넬슨을 먼저 다녀왔다가 블레넘으로 내려갔다면 이런 일이 없었겠지만, 뭐 여행 계획이라는 건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것이므로.. 이게 혼자 하는 여행 그리고 캠퍼밴으로 하는 여행의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하다.



와나카 근처에 있는 하웨와 호수에 먼저 들렀다. 여기도 비현실적인 호수 색깔.. 북섬에서는 다가빌 근처에 카이이위호수 하나 가 봤었는데 남섬에는 여기저기 호수가 많다. 일하다가도 고개 돌리면 크롬웰 던스턴 호수가 보이고.. 호수는 하늘색을 그대로 담(닮)는다.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에는 물 색이 어둡게 변하길래 날씨의 영향을 받는 건가 잠시 생각했었는데, 물 색이 너무 맑다 보니 하늘이 그대로 비쳐 보이는 거였다. 어두우면 어두운 대로, 구름이 이동하면 이동하는 대로 호수 색이 바뀌는 걸 보고 그걸 이제까지 깨달을 겨를조차 없었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그렇게 맑은 물을 본 적이 없으니. (ㅋㅋ)


구글맵도 없이 다시 출발, 이제는 뭐 어차피 큰길이 하나인 걸 알기에 구글맵도 쓰지 않는다. 하스트를 지나 웨스트코스트에 접어들자마자 비가 오기 시작했다. 워낙 서쪽은 비가 많이 온다고는 들었는데 험한 길에 비까지 오니 운전하기가 굉장히 까다로웠다. 게다가 여름이라 점점 대형 캠퍼밴과 렌터카가 많아져서 거의 기어가는 수준.. 아니 저기요 내 차 아닌 건 알겠는데 100 도로를 70으로 가시면 어떡합니까 여러분. 초반에 헬프엑스 할 때 호스트가 ‘빌어먹을 캠퍼밴’이라고 했던 걸 이제는 절실히 이해하게 됐다. 시속 45-55 등의 코너를 돌 때마다 육두문자를 입에 달고 운전함.. 운전을 처음부터 워낙 험하게 배워서 그런가 코너링할 때 브레이크도 거의 안 밟아서 추월당하는 일이 거의 없는 로컬의 경지에 이르렀음! 하하 험한 뉴질랜드 도로에서 이따위로 운전하면서도 사고 한 번 나지 않은 것에 감사합니다. 아이고.


이름도 예쁘지, 루비 비치 드라이빙 코스. 아이스크림도 빠질 수 없다


그레이머스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 넬슨에 올라갔는데 타카카 쪽에서 New Year's Eve 축제가 있어서 한 시간 거리인 모투에카부터 막히기 시작했다. 같이 일하는 애들 중에 넬슨에서 몇 개월 지냈다는 프렌치 커플이 있는데, 걔들이 꼭 가보라던 골든베이와 온천 쪽으로 가보려다가 꽉 막힌 트래픽 때문에 뜨거운 햇볕 아래 익을 것 같아서 그냥 차를 돌리기로. 지난 2월 덮친 허리케인의 여파로 아직도 도로가 공사 중이라 더욱 차가 막히는 것 같았다. 나는 최대한 성수기를 피해서 (사람과 차를 피해서) 여행하는 편이라 이런 것들이 굉장히 익숙지 않았다. 그래서 넬슨 시티센터와 웨스트코스트에 집중하기로. 


돌아오는 길에 아벨타즈만 국립공원에 들렀는데 코스탈 트랙을 걸으며 또 새롭게 펼쳐지는 타즈만 해의 아름다움에 기절.. 휴대폰을 안 들고 가서 사진도 못 찍고, 여벌 옷을 안 가져가서 수영도 못 했지만 허벅지까지 바닷물에 담그고 찰박거리며 놀다가 피곤해서 해변에서 낮잠 자기. 이 아름다움을 언제 또 느낄 수 있을까, 꼭꼭 마음에 담아둬야지 하면서도 자연스럽게 감기는 눈. 평화롭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빈야드에서 받은 와인 한 병을 야금야금 다 마시면서 한 해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고 (한국 나이로) 서른을 맞이하는 경건한 의식을 치렀다.. 넬슨 시티센터에서 불꽃놀이가 있다고 하던데 나는 그전에 너무 신나게 드링킹을 시작했고.. 불꽃놀이고 나발이고 피곤하니까 자자- 가 되어버림. 하지만 아쉽지 않다. 매년 하는 불꽃놀이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행복한 시간을 가지는 게 중요하지.


새해 아침부터 centre of NZ 등반. 고작 15분인데 꽤 가파른 구간도 있어서 헥헥.


일조량이 풍부한 도시답게 시티센터를 걸어 다니는데도 땀이 흐른다. 다행히 가로수들이 잘 되어 있어서 나무 그늘 아래서는 선선한 바람을 맞을 수 있었지만.



조금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됐다. 나는 믿는 종교는 없지만 굳이 택해야 한다면 불교 신자가 될 것 같은데, 절에 가면 항상 안정감이 있었고 큰 불상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너무나 작은 존재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기독교가 싫어서였다. 어릴 땐 친구들이 다 거기 있으니까 가긴 했는데, 매주 교회를 가야 한다고 선생님들이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는 게 싫었고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것도 싫었다. 청년부였던 대학생 선생님이 애들에게 성희롱을 하기도 했었고 목사들의 부정이 자주 뉴스거리가 되는 것도 환멸 났다. 고등학교 때도 미션스쿨이라 종교와 예배시간에 꼭 참석해야만 했는데, 그것도 모자라 일반 수업시간에서도 언급되는 종교 이야기 자체가 너무 불편했었다. 유럽에서 잠시 여행 다닐 때도, 뉴질랜드 전역을 돌면서도 교회나 성당에 들어가서도 그냥 휙 둘러보고 나오기만 했었던 반면, 넬슨의 크라이스트 처치는 뭔가 느낌이 오묘했다. 크리스마스가 막 지난 시즌이라 각 단체에서 만든 트리를 전시하고 있어서 분위기가 더 따뜻했는지도 모른다. 날이 좋아서 (도깨비냐) 기분이 좋아져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교회 안을 한 바퀴 돌면서 성가대가 서는 곳, 설교 제단, 파이프오르간과 스테인드글라스 등 구석구석을 샅샅이 살펴보고 의자에 앉아 영어로 된 성경책을 한 장 한 장 넘겨 봤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코끝이 찡해지면서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뉴질랜드를 떠날 때가 돼서 아쉬워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2019년의 첫날 아침, 과거를 잊고 새롭게 시작하자는 무의식이 눈물을 내보였는지도 모른다. 다시 생각해봐도 왜 눈물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누가 볼세라 급히 눈물을 닦고 한참 심호흡을 하고는 뒤돌아 햇빛을 향해 나왔다.



마음을 가다듬고는, 날씨가 좋아 가든도 잠깐 걸어보고.



넬슨에서 웨스트코스트로 다시 향하기 전 타후나누이 비치에 들렀다. 여기도 교통체증이..! 넬슨은 큰 도시니까 사람들이 홀리데이에 바다를 찾아 다른 곳으로 떠날 것이라는 예상이었는데, 한 가지 간과한 점은 넬슨 자체도 바다에 붙어있는 도시라는 것..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타후나누이 비치가 지척에서 너무 아름답게 파도치고 있다는 것..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자꾸 트래픽에 무너지지 말자 싶어서 기다리고 기다려 주차장에 들어가니, 생각지도 못한 마켓과 어트랙션들이 잔뜩이었다. 차가 막히는 이유가 있지. 신이 나서 마켓을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점심을 사서 먹고 (갈매기에게 위협당하고) 아이스크림도 한 입 했다. 역시 플리마켓은 어디나 옳다. 이제 슬슬 친구들과 가족들의 선물을 준비해야 할 때라 이것저것 사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현금을 뽑아가지 않아서 fail..


아름다운 타즈만 해에 발 담그고 다시 출발.




흐린 그레이머스. 동네는 조용하고 좋았다.


그레이머스를 또 지나 웨스트코스트를 따라 다시 크롬웰로 내려오면서 호키티카에 들렀다. 별생각 없었는데 갑자기 비도 그쳤고 타운센터가 오른쪽으로 보이길래 급하게 우회전.. 별거 없는 조용한 마을이지만 이렇게 죽은듯한 도시가 더 마음에 들 때가 있다. 바다에서 한껏 바람을 맞고 다시 달렸다. 여전히 비가 내리는 웨스트코스트. 이렇게 인연이 아닌가 보다 싶어 관광지인 블루 풀에만 잠시 들렀다가 크롬웰 홈 스윗 홈 (캠핑장이지만)으로 돌아왔다.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프랑스 친구가 물었다. 여기에는 없는데 한국에는 있는, 지금 제일 그리운 게 뭐야? 나는 당연히 음식이라고 대답했고 다들 공감하면서 음식이 제일 그립다며 한 마디씩 보탰다. 이어지는 질문은 ‘한국에는 없는데 여기에는 있는, 가서 정말 그리워할 것은 뭐야?’ 어려웠지만 곧 답이 나오더라. Freedom. 내가 이제껏 한국에서 몇 시간 자고 어떻게 어떤 환경에서 일했는지 다 들은 빈야드 친구들이 다들 으아..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자유를 절실히 느낀 게 크리스마스와 새해 캠퍼밴 여행이었다. 다들 곤히 자고 있을 시간에 일어나 캠핑장을 좀 걷고 일찍 준비를 마친 후 조용한 도로를 달리면서 시원한 공기를 마시는 것. 텅 빈 도로를 나 혼자 달릴 때가 부지기수였고, 아침 안개가 깔린 풍경에 감탄하며 액션캠을 사지 않은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이렇게 눈 뜨자마자 여유롭게 달릴 수 있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겠지, 라는 생각을 하니 리버티와 함께 한 이번 마지막 여행이 더욱 소중했다는 걸 또 한 번 깨닫는다.



*2018 블로그 포스팅을 브런치로 옮기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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