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서 충전하는 건 비단 카페인(Caffeine)뿐 만이 아니다
눈꺼풀 위로 내리쬐는 햇살이 제법 건조하다. 숨을 쉴 때마다 지난밤에 침대에 쌓인 먼지가 목구멍에 들러붙는다. 카악, 카악! 하고는 히이익 하며 기지개를 쭉 편다. 눈이 꽤 부시는 걸 보니 아무래도 아침은 아닌 모양이군. 스마트폰을 톡 건드려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오후 2시가 넘었다.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들을 주섬 주섬 주워 입는다. 어제처럼 검은색 무지 후드에 갈색 코듀로이 팬츠. 착장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하지만 카페에 가는 데 착장까지 신경 쓸 필요 있나, 라고 생각하는 나는 늙은 건가? 됐고, 마음 바뀌기 전에 얼른 신발이나 신자. 아, 로션을 안 발랐네. 다시 벗기는 귀찮으니 그냥 신은 채로 바르자. 우리집 바닥은 3초 이상만 안 밟으면 더러워질 일 없다.
일층 공동현관을 열고 밖으로 나와 담배에 불을 붙인다. 일단 카페로 가기는 하는데, 뭐부터 해야 될지 감이 안 잡힌다. 결재해 둔 인강이나 들어볼까? 그러고 보니 공채 시즌이네. 자소서를 써야겠다. 근데, 자소서를 쓰면 뭐 해. 만들어 놓은 포트폴리오도 없는데. 모르겠다. 일단 가자. 뭐가 됐든 집에서 무기력하게 나자빠져 있는 것보단 낫겠지.
그래, 나는 무직이다. 그냥 무직도 아니고, 서른 중반에 배워놓은 기술 하나 없는 캐백수다. 그래도 서른이 넘도록 경력 하나 없는 씹백수까지는 아니다. 내게도 멀쩡히 직장을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시절의 어감만큼이나 먼 옛날 일도 아니다. 꼬라지를 보니 조만간 시절이 되는 순간이 올 것 같기는 한데, 아무튼 아직은 아니다. 내게도 보잘 것 없지만 경력이란 게 있으니 아직 다시 사회로 돌아갈 희망은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카페에 간다. 매번 비싼 커피값을 내가며 커피 맛이 딱히 훌륭하지도 않은 프랜차이즈 카페에 간다. 우리집 월세가 싼 덕분에 무려 십오분이나 걸어서 카페에 간다. 커피를 좋아해서도 아니고 그저 필요한 에너지를 충전하려 간다. 카페에는 밥상머리나 침대에서는 충전할 수 없는 특별한 에너지가 있다. 무기력세포를 억제하고 각성 효과를 일으키는 특수한 물질이 바로 그곳, 카페에 있다.
바로 카페인이다. 카페인(Caffeine) 말고 카페인(人)을 말하는 거다. 싸구려 카페인이야 집에도 넘쳐나지만, 하루종일 앉아서 빈 커피잔에 맹물을 리필해가며 공부만 하는 지독한 족속들인 카페인(人)은 오로지 카페에만 있다. 요즘 사람들은 그들을 ‘카공족’이라 부르는 모양이더라. 여하튼 나같은 인간은 카페인을 주기적으로 충전해 줘야 사람 구실을 한다. 그래야 비로소 각성하고 정신을 차린다. 맞아. 사람은 항상 정신을 차리고 다녀야 된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왔던 발걸음을 돌려 지나쳐버렸던 카페로 들어간다.
자리를 먼저 맡아놓을까 하다가 그냥 계산대로 간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드려요? 라는 물음에 멋쩍게 네라고 대답하고는 카드를 리더기에 욱여넣는다. 알바가 나를 알아보네. 이제 여긴 안 와야겠다. 진동벨과 영수증을 받아들고 빈자리를 찾아가는데 아니, 이게 왜 벌써 드르륵거려? 왔던 길을 되돌아가 커피를 받아들고 다시 자리를 찾으니 그새 빈자리가 사라졌다. 하, 지독한 카공족속들. 그런데 아차, 맥북 충전기를 두고 왔네. 어제도 충전 안 해놨는데. 하하하. 오늘 하루도 조졌네. 결국 다시 계산대로 간다.
저, 죄송한데 이거 다시 테이크아웃 할 게요. 집에 들어갔다 다시 나올 자신이 없거든요. 그나저나 한국 사람들 정말 부지런하네요. 평일 오후 3시인데 빈 자리가 없다니. 오늘도 하루 더 도태되네요. 저는 아무래도 안 되려나 봐요. 저 독한 것들을 어떻게 이겨요. 그래도 내일은 더 일찍 일어나 볼게요. 절대 안 되겠지만, 시도는 해 봐야죠. 감사합니다. 그런데 오늘따라 커피가 무지하게 쓰네요. 카페인 때문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