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세탁
원래는 샤워를 하려고 했다. 속옷을 넣어 두는 서랍장을 열었는데 팬티가 다 떨어졌다. 폼클렌징 거품을 얼굴에 문지르며 편의점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지금 입고 있는 팬티도 어제 산 거더라. 내가 입은 팬티를 상상하는 편의점 알바를 상상했다. 역시 안 되겠다. 오늘은 미뤄왔던 빨래를 돌릴 수밖에 없는 날이다.
묵직해진 빨래바구니를 들고 방바닥을 걸었다. 집이 좁아 다섯 걸음이면 충분했다. 막상 하면 별 거 없는데, 뭐가 그리 귀찮다고 미뤄왔을까. 나는 스스로를 질책하며 빨랫감을 세탁기에 욱여넣었다. 과연 열흘 정도 푹 익힌 빨랫감다웠다. 집어들 때마다 눅눅해진 땀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세제 투입구에 세제를 먼저 넣고, 그 다음 섬유유연제를 듬뿍 따랐다. 섬유유연제의 향기가 눅눅함에 찌든 내 코를 단번에 정화시켰다.
그러고는 곧장 샤워를 했다. 어제 산 새 팬티니까 하루 더 입기로 했다. 벗어둔 팬티를 다시 입고 밖으로 나와 담배를 태우고, 지겨운 저녁 메뉴를 고민하다 보니 어느새 빨래가 끝났다. 침대 옆에 건조대를 펴고, 다섯 걸음이 귀찮아져 세탁기 안의 내용물을 대충 건조대 앞으로 툭툭 던졌다. 문득 방바닥을 언제 청소했는지 궁금해졌다. 기억이 나진 않았지만, 빨래는 산뜻한 향의 섬유유연제로 코팅됐으니 괜찮지 않을까?
옷들을 주섬주섬 하나씩 널 때마다 기분도 한결 좋아졌다. 몸과 마음마저 청결해지는 느낌이었다. 저절로 몸이 흠칫거렸다. 오랜만에 콧노래가 나왔다. 내가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다! 그렇게 먼저 티를 널고, 수건을 널고, 그 다음 팬티를 널었다. 향긋한 팬티 냄새가 지금 당장이라도 갈아입고 싶은 욕구를 일으켰다. 나는 충동을 억제하며 마지막 아홉 번째 팬티를 널었다. 손을 털기가 무섭게 마음이 청결하다 못해 허전해지기에 이르렀다. 빨래를 다 널었는데도 건조대 위쪽 세 칸이 남았다.
나는 다시 세탁기로 돌아가 비어 있는 드럼통을 휘저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걸어가 이번에는 빨래바구니를 열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분명 뭔가가 빠졌는데. 생각이 났다. 양말이다. 건조대 위쪽 일곱 칸 중 네 칸은 팬티 자리, 그리고 나머지 세 칸은 양말 자리다. 그런데 딱 세 칸이 빈다. 다시 생각이 났다. 아하, 나 집에서 안 나갔구나. 열흘 동안 외출이라곤 팬티 사러 집 앞 편의점 갔다 온 게 다구나.
나는 기분이 좋아진 김에 생각했다. 내일은 오랜만에 밖으로 나가봐야겠다고. 지금의 나는 너무 눅눅해져 있다. 건조대의 빈 자리 세 칸이 나의 눅눅함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밖으로 나가야겠다. 할 게 없으면 카페라도 가고, 그게 지겨우면 서점에라도 가야겠다. 어디든 다녀와서 꼬릿해진 양말을 빨아 건조대에 널어야겠다. 히키코모리처럼 방 안에서 푹 익어버린 나란 인간을 하루라도 빨리 세탁해야겠다. 다시 세상이라는 건조대에 향긋해진 나를 널어야겠다. 미루지 말아야겠다.
오늘 빨래를 하길 참 잘했다.
어제 편의점에서 팬티를 사길 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