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책을 좋아하고, 글 쓰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글쓰기를 두려워한다. 비어있는 흰 종이나 빈 워드 페이지를 보고 있으면 늘 심장이 두근거린다. 어느덧 90개가 넘는 글을 브런치에 올리게 되었지만, 글을 쓰는 매 순간에는 여전히 막연하여서 긴장이 된다.
이런 내가 또 어찌어찌해서 글을 마무리 지었다. 기특하고 대견하기도 하지만 약간 신기하면서 의아하기도 하다. 내가 정말 끝을 냈다니. 아마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쓰라고 하면 못 쓰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왜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어떤 작품(소설, 곡)을 쓴 후에는 한동안 그 작품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말. 내가 약간 그런 상태인 것 같다. 그만큼 진심을 담아 잘 쓰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다는 반증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솔직히 내 글이 단 한 사람의 마음에라도 파장을 일으켰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알기에 아쉬운 마음이 든다. 아무튼 난 여러 잡생각을 겨우겨우 뿌리치고 글을 써냈다. 그 힘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수오지심이라고 답하고 싶다. 내가 뭐라고 이런 거창한 이유를 드느냐고 할 수도 있지만, 사실이다. 기후 위기의 핵심 키워드는 내가 여러 번 반복했듯이 문명 그 자체다. 그 말은 결국 인간이 기후 위기를 초래했다는 말과 같다. 그렇다면 인간 스스로가 스스로를 괴롭히는 꼴인데, 그 모습을 자각하고 있자면 수오지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인간뿐만이 아니라 지구에 사는 상당수의 생물들이 괴롭힘을 당하고 있지 않은가. 누군가는 시비지심이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는데 그러기는 쉽지 않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문명은 시시비비를 가리고, 잘잘못을 따질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신의 과오를 부끄러이 여기어서 겸손함을 가지는 것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최선의 마음가짐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려면 문제의 본질을 명확히 바라보아야 한다. 내가 여러 번 반복하여 문명과 기후 위기를 동일시하는 이유이다.
나는 기후 위기에 대해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그리 긍정적인 느낌을 가질 수 없었다. 그래서 희망적인 말보다는 현실들 뼈저리게 직시할 수 있을 만한 말을 주로 했다. 조금은 아찔한 느낌을 받기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래야 변할 것 같았다. 당근보다 채찍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끝내서는 안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뭔가 희망적인 말을 해보려 한다. 인간이 현재 최상위 포식자가 된 이유는 다양하지만, 가장 핵심이 되는 키워드를 꼽자면 ‘사회성’이라고 생각한다. 동물들은 주로 먹이를 발견한 장소에서 즉시 먹어 치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벌레를 새끼에게 물어다 주는 새와 같은 부류로 반론하지 않길 바란다. 보통은 새끼와 부모가 함께 다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대부분이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의 선조들은 불을 사용하며 음식을 익혀 먹기 시작했고, 사냥한 먹이를 들고 와서 기꺼이 부족과 나눠 먹으며 생존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물론 이 점도 충분히 반론 가능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화된 인간의 집단지성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었다. 문명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인간이 기후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의지해야 할 것 역시 사회성이 아닐까? 우리를 문명으로 이끈 사회성이 우리를 지금의 위기에서 구해낼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점이라고 생각한다. 문명과 기후 위기는 참 아이러니한 연관성인 것이다. ‘우리’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모두가 관심을 가진다면 기후 위기는 분명 극복하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연대를 한다면 말이다.
PS. 글을 읽어 주신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부디 기후 위기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주시길 부탁드리며 글을 마무리 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