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나 Aug 08. 2019

단어3, Verlust

여행하는 말들


      선생님께 메일을 보내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생각했지만 쉽지 않았다. 염려의 말이 먼저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수술의 징후는 어떠한지, 병원에 들어간 노모의 상태는 어떠한지, 무릎 관절은, 식사는 제대로 하시는지, 날이 많이 추워졌는데 따뜻하게 잘 계시는지.

내가 대학교에 입학한 해가 선생님의 정년퇴직 해였다. 나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고작 1년 받았을 뿐이다. 공정성 있고 조심스러운 성향의 선생님은 수업시간에도 학생들과 눈을 마주치는 법이 없었다. 선생님의 시선은 항상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우리보다 약간 높고 먼 벽면에 가닿아 있었다. 학생들과 개인면담을 할 때에도, 동료 교수와 있을 때에도 연구실 문을 살짝 열어두었다. 약간 강박적인 조심성처럼 여겨지기도 했지만 그런 흔치 않은 모습이 좋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첫 소설을 안고 연구실에 들어갔을 때, 선생님은 소설 앞장에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두고 나가라고 했다. 신입생이냐, 소설을 쓰냐, 이런 개인적인 관심을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일말의 눈길도 주지 않는 선생님의 바쁜 뒷모습을 몇 초간 바라보다가 꾸벅 인사를 하고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며칠 뒤 선생님은 나를 불러냈다. 그제야 관찰하듯이 내 눈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말하셨다. 좋은 토양을 발견한 것 같구나.


      많은 시간이 흘렀다.

대학 내내 소설 쓰는 일에 몰두해 있었지만 무엇을 써야 하는지, 무엇을 쓸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렇게 독일에 왔고 내 세계가 다른 방식으로 넓어지고 깊어지는 대신 문학과는 점점 멀어졌다. 그러나 선생님이 남았다. 여전히 나를 볼 때면 새로 발표된 좋은 단편소설을 따로 인쇄해 건네며 언제쯤 네 소설이 담긴 첨부파일을 보내줄 거냐고 재촉하시지만, 우리는 문학으로 연결된 사제관계의 틀을 넘어서 긴 시간차를 둔 삶의 동료가 되어가고 있다. 며칠 전에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삶의 어느 순간 사람들은 '몇 년을 살았다'에서 '앞으로 몇 년 남았다'라는 생각으로 자연스럽게 전환하게 된다고 한다. 얼마 전부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보낼 수 있는 크리스마스나 생일, 계절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카드 하나를 고를 때도 더 마음을 쏟게 되고, 대화 한 번도 더 애써 기억하게 된다. 그러다 언젠가는 '내가 보낼 수 있는 봄은 얼마나 남았지, 라는 생각을 하는 날도 오겠다 싶었다." 나의 머뭇거림은 이런 불안으로부터 연유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선생님께 보낼 메일을 미룬 것은 내가 먼 곳에 있는 동안 놓치고 있는 장면들을 회피하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른다. 어제 낮부터 쓴 편지를 오늘 정오가 되어서야 발송했다. 나의 기나긴 고민이 무색하듯 선생님께서는 세 시간 만에 답장을 보내주었다. 미얀마에 다녀왔다, 왜 이제야 갔는지 후회될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이곳에서 한 젊은 가이드를 만나게 되었는데 봉사로 한평생을 살아가겠다고 한다, 사진을 첨부한다, 그 사람은... 그 순간, 너무나 가까이 있어 고통스러웠던 나와 멀어진다. 더 이상 그 어떠한 곳도 궁금하지 않을 때, 이미 내 앞에 정해진 삶의 절차가 놓여 있다고 생각될 때, 탈출구는 없다고 포기하게 될 때, 그 순간, 먼 곳에 존재하는 익명의 사람들이 나를 깨운다.

선생님의 아픔을 다시 생각한다. 구원은 온전히 '나'로부터 시작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학의 세계로 도피하듯 떠나가 타인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고, 먼 나라를 여행하고 직접 부딪치면서 자아가 먼지만큼 미미 해지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과 거리를 두고, 그 실체를 파악하고 자신만의 정의를 쌓아 올리면서 상실의 아픔을 치유했을 것이다.



      죽음의 문턱에서 사랑의 가치를 말하는 이들을 보면서 나는 살면서 어떤 사랑을 경험하게 될까 생각한다. 사랑 앞에서 내 감정은 대개 고요했던 것 같다. 내 인생이 가장 중요하며 외부자의 영향으로 인생이 휘청일 만한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수없이 다짐하는 냉소적인 겁쟁이였기에 늘 담담해 보일 수 있었다.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고 물론 지금도 모른다. 그러나 조금씩 배운다. 나뿐만 아니라 상대도 상처 받는 일이 두렵고 아픈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랑은 늘 실패의 예감을 풍기며 존재를 뒤좇고, 결속상태는 수많은 강박과 두려움을 동반한다. 그 상황을 서로 나누고 이해하며 함께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 작가는 사랑을 주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의 관계는 한 사람이 다른 하나에게 자신의 힘과 권위를 포기하고 주도권을 바치는 것이라 했다. 단순히 어떤 힘의 게임이 아닌 두 사람 모두 상대방의 긍휼과 용납함 아래에 있다고 썼다. 나는 이 말을 오랫동안 곰곰이 곱씹어 본다.


      이 모든 과정에도 불구하고 예기치 않게 사랑에 실패했다면, 그렇게 상실감과 고통을 마주하게 되었다면, 우리는 그 슬픔을 인정하고 사랑의 고통이 자신을 어떻게 파괴하고 끝내 회복시키는지 무연히 바라볼 수밖에 없다. “Why is the measure of love loss?” 사랑의 끝은 또 다른 시작이며, 상실함은 영원히 내 안에 소유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작가의 이전글 피터 싱어 <효율적 이타주의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