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인듯 어른인 듯 보이는 수르에게
너를 처음 만난 건 2년 전이다.
오래 전부터 서울에 가면 꼭 만나자고 약속했었다. 사실 그것은 단순한 인사치레 수준일 수 있었다. 공항에 도착한 날을 용케 알아낸 네 엄마가 아니었으면, 그냥 시간의 흐름 속에 잊혀졌을 수도.
나는 어느 국가의 이방인이다. 태어난 곳과는 현실적 거리감이 존재한다.그래서 고국에 가는 건 녹록치 않는 대가 지불이 필요하다. 공중에 뿌리는 시간과 돈도 그렇고, 시차적응에 따른 호르몬의 불균형도 무시 못한다. 오랜만에 친지를 만나는 일에 시간을 할애하다보면 어느새 돌아갈 때가 된다. 그래서 개인 일정을 차곡차곡 해내는 것은 냉정을 필요로 한다.
서설이 길었다.
서울역 뒷편 어디메쯤 예술가들을 위한 아파트가 있다고 말했다.
너의 집 근처 단골카페에서 처음 만났다. 너의 엄마는 국립 현대미술관에서 전시회를 할 정도로 막이 오른 예술가였다. 프랑스와 독일 등 유럽에서 유학했기에 창작의 경계도 자유로웠다. 세계 곳곳에 산재한, 예술가들을 위한 레지던스 사업에도 여러 번 선택되어 불려다녔다.
나는 원래 너의 엄마랑 먼저 아는 사이였다.
독일에서 유학 중이던 너의 엄마는 당시 이십대 후반의 미혼여성이었다. 난 아이 둘을 가진 엄마로, 삼십대 어디메쯤에서 방황하며 서성거렸다. 전혀 공통분모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너의 엄마라는 사람은 편하게 느껴졌다.
아마 이상야릇한 외모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너의 엄마의 첫인상은
아방가르드적이고 보헤미안스러웠다.
선천적 초강력 곱슬이었을 것 같은 빠글빠글 머리를 어깨까지 내려뜨렸는데 묘하게 자연스러웠다.
나 또한 천연 곱슬이다.
한번은 드라이를 하지 않고 자연건조했던 적이 있다. 그때 거울을 보고 뒤로 자빠질 뻔 했었다. 이상한 여자가 서 있었다. 흡사 아인슈타인이나 쿤타킨테가 친구 하자고 달려들 것 같았다. 잔뜩 말라비틀어진 푸성귀처럼 볼썽사나운 머리카락를 가진 나였다. 두통이 올라와 곧바로 한국인 미용실에 가서 울트라 매직으로 머리를 쫘악 폈다. 그런데 너의 엄마는 평범하지 않는 외모가 비범의 이유였다.
너의 엄마는 쌍꺼풀 없는 눈을 가졌다.
외국에서 백인들에게 은근히 외모 놀림을 받았을 법하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도 무쌍이 환영받지 못한 시대였다. 그런데 나에겐 방부제 없는 야생 채소처럼 싱싱하게 느껴졌다.
너의 엄마는 공부를 끝낸 후 한국으로 돌아가고 연락이 두절되었다. 여러 소식도 건너건너 들려왔다. 오래 사귄 사람과 헤어졌다는 말도 들었다. 그리고 나의 절친을 통해 너의 엄마의 현주소를 들은 건 약 5년 전 쯤이다.
2년 전 처음 만났을 때 너의 엄마는 그대로였다.
세월을 거스른 외모에 놀랐다. 머리카락이며 눈이며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았다. 단지 너의 엄마 곁에 너라는 존재가 생겼다는 것뿐.
그런데 너는 엄마를 이상하게 닮지 않았다. 너는 반듯하고 곧은 머리칼에 쌍커풀도 진했다. 아마도 아빠의 우성인자를 받았을 법했다. 너의 엄마에게서 한 번도 배우자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는데, 한사코 물어보지도 못했다. 너의 엄마가 지나왔던 과거를 어렴풋이 알기 때문이다.
그래도 너라는 진주알을 품었으니 어떤 정자의 정체를 안들 큰 의미는 없는 것 같았다.
그날을 기억한다.
총 네 사람이었다. 나와 나의 딸, 너와 너의 엄마.
너는 막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고 말했다.
제도권에 처음 들어서는지라 다소 설렌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너의 말을 빌리자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유치원에서의 시간을 털어놓았다. 그것을 너는 과거의 일이라고 할배처럼 도리질쳤다. 당돌해 보이는 너의 모습에 예전 너의 엄마의 모습까지 오버랩되었다.
너가 자신이 몸담았던 조직(유치원)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는 모습은 나도 좀 뜨악했었다.
친구들이 엄마가 타고다니는 차종이 무엇인지 물었다고 해서 더 경악했다.나나 너의 세계는 한참 다른 줄 알았는데 거기서 거기구나, 생각이 들었다. 내가 너무 오래 한국을 떠나와서 실상을 모르는 것 같아 자괴감까지 더해졌다.
차도 없고 집도 월세로 살아가는 내가 한국에 돌아오게 되면 그런 류의 질문 앞에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잠시 고민했다.
너와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었는데 자꾸만 너의 엄마라는 사람이 말을 걸었으니 이해해주길 바란다. 한 가지 기억나는 건 '남자친구가 있냐'는 질문에 없다고 답한 너였다. 왜 없냐고 하니, 없는 게 낫다고 했었다. 그리고 말을 덧붙였다.
'남친이 있으면 영화볼 때
팝콘을 나눠먹어야 하니
없는 게 낫다'고 말했었다.
그때 피식 웃고 말았는데, 지금 생각하니 일리 있는 말이다.
최근에 가족들과 영화관에 갔는데 네 명이서 팝콘 2개만 샀었다. 그래서 팝콘 먹기가 곤혹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너는 나름대로 호칭을 정해놓았다. 20살까지는 언니, 40살까지는 이모, 50살까지는 아줌마, 50대 이후는 할머니라고 했다. 갑자기 그 말을 듣자 뜨끔해졌다. 이제 나이를 인정해야 할 때인가 보다. 할머니!
두 번째 만남은 독일 베를린에서다.
2년 전보다 훌쩍 큰 너의 모습은 낯설었다.
쌍커풀이 큰 눈에는 동그란 안경이 얹어 있었다. 나름 조숙해 보였다. 네덜란드에 있는 예술인들을 위한 입지작가에 선정된 너의 엄마를 따라 1년 동안 살게 되었다고 했다. 놀기 뭐해서 네덜란드 국제학교를 다닌다고 말했다.
처음엔 도시락으로 빵을 싸갔는데 지금은 주먹밥이나 김밥을 싼다고 하며, 아무래도 해외 나오니 더 우리 밥이 땡긴다고 말해서 당황스러웠다. 벌써부터 우리 것이 땡긴다는 말을 하니 나이가 먹은 게로구나, 생각했다. 2년 전엔 가수 아이비를 좋아했는데 지금은 아이돌쪽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고 했다. 이제 나이가 두 자리 숫자가 되니 세상 일이 유치해진다며 웃는 네가 나와 동년배의 웃음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엄마, 네모나고 작고 스티커가
붙어 있는 거 줄 수 있어요?"
무슨 말인가 했다. 너의 엄마가 너에게 허리를 숙여 경청하곤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기 전까진 난 몰랐다. 예술가의 피가 딸인 너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는지 핸드폰을 표현하는 방식도 그렇고 핸드폰에 그림을 그리는 모습도 이색적이다. 나름 색깔 배합도 좋다.
이번에도 넷이었다. 나와 나의 딸, 너와 너의 엄마.
베를린의 한식당 '소반'에서 밥을 먹고, 나폴레옹이 즐겨 찾던 아인슈타인 카페에서 디저트와 커피를 청했다. 밥은 내가 샀고, 음료수는 너의 엄마가 쐈다. 나폴레옹이 프로이센을 점령했던 1806년에 백말을 타고 '보리수 나무 아래' 거리를 행진한 나폴레옹 이야기를 해줬다.
너의 눈이 반짝 빛났다. 자신은 역사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그러냐고 했더니, 믿지 못하는 거냐고 나에게 반문했다. 아니, 믿지 못하는 게 아니라 '크게 놀라는 거'라고 했더니 너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시간만 더 있으면 베를린의 볼거리를 가이드 해줄 수 있을텐데,라고 했더니 지금 하면 되지 않느냐고 너는 말했다. 그래서 나는 오후 5시에 연극 공연 약속이 있어서 안 된다고 말했더니 너는 잔뜩 실망한 눈치였다.
그래서 너에게 12월에 내가 쓴 희곡으로 연극을 올리니 다시 기차 타고 오라고 해서 겨우 마음을 가라앉혀 주었다. 너의 엄마는 예술가답게 연극에 대해 진중히 묻고 12월에 꼭 오겠노라고 했다. 그러면 너와 세 번째 만남이 되는 거다.
너와 너의 엄마의 대화모습을 보며 나는 나의 딸에게 미안해졌다. 만약 나의 딸이 핸드폰을 묻는 질문을 그 따위로 한다면 '뭐 달라고? 응?'이라고 되물었을 나였다. 그런 과거의 나에게 질타를 하고 싶어졌다. 나의 딸도 너와 너의 엄마의 대화가 생경스러운 눈치였다. 엄마 따라 해외를 자주 다니는터라 새로운 것을 탐닉하는 것에 익숙해보였다. 익숙한 것에 대해 자주 결별한다고 너는 강조했다. 또랑또랑 재치있는 말을 하는 네가 내 마음의 나이와 비슷할 거라는 괜한 기대감도 가졌다. 너는 절대 아니라고 하겠지만 말이다.
너와 헤어지며 물었었다.
"너, 한국이 좋아? 네덜란드가 좋아."
"타향살이가 다 힘들죠. 뭐"
그래, 한 방 먹은 느낌이다. 넌 역시 나랑 동년배야.
세 번째 만남이 기대된다. 키도 마음도 생각도 커져 있을 너이기에, 그에 반해 나는 더 늙어졌을 나이기에.
피천득의 인연에서 아사코처럼 낡고 병들지 말아야 하는데. 그래야 네 번, 다섯 번까지 만나고 싶어질텐데.
수르야! 나에게 너가 복용하는 피터팬 방부제를 나눠줄 수 있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