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야! 칼 갈아놨다
"이제 그리 젊은 나이도 아니니 콜레스테롤 약을 시작해보죠"
주치의는 말했다. 당뇨에다 콜레스테롤 수치도 높단다. 2월에 검사할 때보다 더 높다고 겁박을 한다. 쫄보 심장이 더 오그라든다.
"좀 생각해보겠습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의사도 둥절한 표정이다. 무슨 마음의 준비라니? 라는 표정이다. 그래도 난 한 번 먹으면 평생 먹어야 할지도 모른다는데 미리부터 먹고 싶지 않았다.
"아니, 몸이 뚱뚱한 편도 아닌데 콜레스테롤 수치라니..."
의사는 내 혈압을 재면서 말을 돌린다. 우리 집안 내력상 마른 몸이 주는 효용은 하나도 없다. 물론 덩치가 큰 몸은 노인성 질환 등에 위험성이 더 높겠지만, 외형이 마르다고 해서 등식이 성립하진 않는다.
"저희 부모님 모두 그래요.
가족력이라 제가 어쩔 도리가 없네요."
가족력이라는 단어는 늘 위협적이고, 어쩌면 신의 경지다. 태생이 그러니 어찌할 수 없다는 데 인간이 무슨 재간으로 막을 것인가? 그렇다면 그 태생이라는 것을 바꿀 순 없는 것인가? 있다고 반문하는 건강 너튜브를 보면서도 끝내 의문을 던진다. 어쨌든 난 아모레 파티(운명을 사랑하라)적 삶을 즐긴다.
당뇨 결과를 딸1호와 2호에게 보고하니, 그들의 얼굴에 걱정이 한 바가지다.
그들에게 엄마는 어떤 존재인가? 육중하지 않은 몸으로도 인생을 쥐락펴락할 듯한 무소불위의 여인이다. 그렇게 강력한 정신력으로 살았다.
맥주와 소시지로 무장한 투박한 게르만인들 사이에서 밀리지 않는 투지도 있다. 하지만 나이는 진솔하고 정직한 법.
어느새 딸 1호가 내 손에 든 초콜릿을
잽싸게 뺏는다.
저녁상을 물린 후 최애하는 수박 앞에서도 무안을 준다. 야멸찬 뺑덕어미처럼 수박그릇을 저만치 밀어놓는다. 나를 생각하는 것까진 좋은데 혹시 내 몫의 수박을 차지하려는 심보일까? 괜스리 맘이 쫌새가 되다가 고개를 젖는다. 결정적으로 딸1호는 수박을 싫어한다.
'애들아, 과일보다 무서운 게 탄수화물 덩어리인 밥인데...'
마음 속의 생각이 비집고 나왔나 보다. 혹시 내 앞의 밥까지 저만치 밀어내는 건 아니겠지, 또 쫄아본다. 그래도 아직까지 우리집 쉐프는 나다.
"엄마, 우리 현미밥으로 먹어요.
아니면 콩 같은 거 섞어 먹든지"
휴! 다행이다. 대안이라는 건 언제나 환영이다. 하지만 문제는 개인적으로 콩이나 조나 수수나 현미 등 쌀에 다른 곡류가 들어가는 것을 별로 반기는 편이 아니다. 포동한 쌀밥의 풍미가 나에겐 매력적이다. 그래도 살려면 식단을 개선해야 하는 건 모두를 위한 처사다. 무엇보다 늙어서 병들면 가족이 힘들다.
나는 유머랍시고 애들에게 한 마디 거들었다.
"너희들도 혹시 가족력의 그물에서 자유롭지 못한다면, 지금 단 것, 맛있는 거 실컷 먹어라. 나중에 먹고 싶어도 못 먹는다. 하하"
아이들이 어이 없다는 듯 웃는다. 그건 정녕 대안이 아닐진대,라는 표정이다.
"미리 조심해야 건강하게 살죠."
그렇지. 그게 뻔한 정답인데 사는 게 그렇게 간단하진 않단 말이지.
돌아가신 아버지를 소환했다. 아버지가 가장 최애하는 과일은 홍시였다. 하지만 매일 인슐린을 투여하는 당뇨환자에게 홍시는 그림의 과일일 뿐이었다. 과일은 괜찮다는 말도 있는데 식이요법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엄마의 성화에 아버지는 홍시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전혀 다른 질병으로 갑자기 돌아가시자 엄마는 내내 한탄했다.
"그렇게 금방 가실 거면
좋아하는 홍시라도 실컷 드시게 할 걸!"
그러게 말이다. 망자 앞에서 모든 게 아쉬운 법이지만, 나도 조금 그 말에 수긍한다. 조심하는 건 좋지만, 의외로 생을 마감할 때는 전혀 다른 이유로 갈 수도 있다. 그렇게 먹고 싶은 홍시를 외면했던 게 오히려 더 큰 고통을 야기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든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그냥 적절히 음식과 타협하며 먹고 싶은 것을 그냥 먹기로 했다. 어차피 생명은 조물주의 소관이다. 단지 내가 하는 것은 기쁜 마음으로 음식을 청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음식이 반가이 나의 내장에 들어와 적절하고 유익한 영양소를 분배하리라 믿고 확신한다.
검사 결과를 들으며 오만 가지 생각이 핑 돌았다. 어쩔 수 없는 가족력이라지만, 현타가 조금 왔다. 해도해도 너무 빨리 왔다. 골다공증이나 당뇨나 뇌경색 등등은 노인성 질병의 범주인데 난 어느새 그들을 받아들여야 할 시점이 된 것이다.
주변에 잘 걷지 못하는 노인들을 보면 나의 미래 같아 조바심 난다. 언젠가는, 누구나 다가올 노년인데 난 젊음이 영원할 것처럼 팔을 휘휘 저으며 당차게 걸었는데 말이다.
날이 갈수록 건강 청구서가 마치 밀린 숙제처럼 몰려온다.
분투하고 쏟아부었던 이십대
턱걸이로 스물 아홉에 결혼을 하고
부랴부랴 아이를 낳았던 시간이 있었다.
일하면서 육아하던 정신줄을 놓았던 삼십과 사십대는 아예 기억 저편이다.
당시 직장에서는 팀장급으로
가정에선 엄마로, 시댁에선 맏며느리로,
친정에는 행동대장 막내딸로 살았던 한국생활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고 전쟁터였다.
90년대 학번들은 죄다 그런 길을 걸었을 법하다. 지고지순하고 성실하게 직장이 최고의 공간이고 불패의 신이었다. 죽어도 거기서 죽어야 한다는 깃발을 숨죽여(?) 외쳤다. 난 결국 패잔병처럼 쓰러져 질병을 얻었고, 그 사이에 독일에 올 기회가 생겼다. 질병의 지게를 지고 이국만리로 떠난다는 게 두려웠지만 살기 위해서 떠나자 했다. 그 사이에 아이들은 오이처럼 쑥쑥 자랐다. 이제 나는 그들의 지금 나이를 추억하는 중년이 되었다.
얼굴에 주름이 늘어나고 눈은 침침해졌다. 생각과 아이디어는 천리 앞 길을 달리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총기는 여전한 듯 싶으나 기억은 외면하고 돌아선다. 날 선 안테나를 올렸던 합리적 사고는 점점 뼛국이 슴슴한 사골국처럼 진이 빠졌다.
오래 전 선배작가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조금이라도 젊을 때 글 많이 써놔.
나이 들어서는 눈이 침침해서 책도 못 읽어!"
그게 내 일이 될 줄은 몰랐다. 요즘 컴퓨터를 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다. 눈을 비비고 안경을 벗고 컴퓨터에 돌진할 기세로 뚫어져라 쳐다봐도 흐릿한 글씨는 나를 우롱한다. 젊을 때 글 좀 쓰지 뭐했냐? 라고 비아냥댄다.
나도 할 만큼 했다고? 아무리 항변해도 증거 제출이나 하라고 윽박지른다. 심증만 수두룩하다.
외면적 모습도 낡았다. 이제 그 옛날 (믿거나 말거나) 누군가 나의 모습에 반할 나이도 아니고, 나도 누군가를 흠모할 나이도 아니다. 근데 그게 그리 슬프지 않다. 로맨스만 연기하던 어떤 여배우가 사십이 넘어 이제 조연급으로 밀려나고 이십대 젊은 여배우들의 엄마로 분한 것에 대해 서글프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미모는 사그라든다. 그 갭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는 거울을 보며 '거울아, 누가 더 이쁘니?'하며 슬프게 나이들어간다. 하지만 나는 다행히 왕년에 날렸던 여배우도 아니어서 감사하다.
지난 번 나의 브런치북 <사과껍질처럼 별 시덥지 않은 이야기>에서 '날마다 고기를 먹는다'는 피드를 올린 적 있다.
아무리 콜레스테롤 높아도 그저 에너지 뿜뿜을 위해 안 좋아하는 고기를 먹기로 했던 터다. 사실 고기 이야기 하면서 우리집 근처 여우가 자주 보인다고 해서 요리법을 알려달라고 글을 썼다. 근데 그 녀석이 눈치를 챘나보다. 요즘 안 보인다
P.s
혹시 독자분들 중에 누가 여우에게 귀뜸을 한지도 모르겠다. 좋게 말할 때 순순히 알려주시길 바란다. 누가 여우에게 도망가라고 말하신 건지.
요새 그 녀석이 눈에 안 보여서 여간 손이 근질근질한 게 아니다.
여우야! 칼은 갈아놨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