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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구십칠 Nov 22. 2020

서대문구 명예 보안관을 위한 맥거핀 효과

 

 내가 거주하는 서대문구에는 정의의 사도가 한 명 살고 있다.

출퇴근 시간에 주로 목격되는 이분은 불의의 장면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이시다.

옳지 못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면 반드시

"저기요!"

하며 항의를 해야 하는 원칙주의자.

운전을 위험하게 하는 사람들, 공공장소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 금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우시는 사람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 새치기를 하는 사람들이 주요 대상이다.


이런 분이 주변에 있다는 것은 참 든든하고 때로는 대리만족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다들 마음속으로만 품었던 정의를 직접 실현시켜 주시는 분이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되는 마음이 크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분이 바로 나의 아내이기 때문이다.


중학생 시절 명예 포순이를 역임하기도 했던 아내는 언제나 정의감이 충만하다.

아내의 행동이나 지적은 분명 옳으나 세상은 옳고 그름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아내의 항의에

"네 알겠습니다. 그것 참 죄송하게 되었네요."

하는 분들만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혹시라도 불필요한 싸움으로 번질까, 무슨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늘 걱정되는 마음이다.


처음에는 이런 나의 걱정을 아내에게 차근차근 설명도 해보았으나 그때마다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그래서 흥분한 정의의 사도를 진정시키고 사건을 큰 문제없이 종결시키기 위해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된 몇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로 터득했던 방법은 '회피하기'이다.

애초에 문제가 일어날 만한 상황을 최대한 피하는 전략이다. 예를 들면 되도록 시끄러운 곳에 가지 않기, 흡연자들이 많은 골목길은 일부러 돌아가기, 너무 멀지 않은 거리라면 걸어서 가기 등이다.

하지만 불의의 현장은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예측하기 어렵기에 분명한 한계를 가진 전략이라고 할 수 있겠다.


두 번째로 시도했던 방법은 '선점하기'이다.

새치기를 하거나 공공장소에서 시끄럽게 구는 사람을 만나면 아내가 반응하기 전에 먼저 화를 내는 척하는 것이다.


“아니! 여기 혼자 있는 것도 아니고, 저렇게 시끄럽게 통화를 하면 어쩌나? 나는 도저히 못 참겠어!"

하고 먼저 화를 내는 척하면 아내는 나를 진정시키는 데에 집중하게 되어

"아니야. 저분도 뭔가 사정이 있으시겠지."

하며 수그러드는 것이다.

꽤 효과가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의 의도를 아내가 눈치챈 이후로는 쓰기 어렵게 되었다.


최근에 찾아낸 방법은 '주의 분산시키기'이다. '맥거핀 효과'를 응용한 방법이다.

맥거핀 효과는 히치콕 감독의 영화에서 유래한 용어로 영화 속에서 중요한 장면인 것처럼 등장하여 관객들을 주목시키지만 사실은 줄거리와 큰 상관없는 낚시용 장치를 말한다.


새치기를 하려는 아주머니에게 아내가 항의를 하려는 순간, 굉장히 중요한 정보인 것처럼 다른 이야기를 꺼내 아내의 주의를 분산시키는 것이다.


"어? 잠깐만. 저 아주머니 장바구니에 든 것 봤어? 두부가 2모나 들어있네. 저 두부회사에서 최근에 신제품이 나왔는데 말이지.."

하며 이야기를 길게 끌고 가다 보면 어느새 아주머니는 멀어져 있고 아내도 방금 전 상황을 잊게 되는 것이다.

아직까지는 아내가 눈치채지 못해 꽤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다.


뉴스에서는 연일 흉흉한 사건사고가 오르내리고 있다.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걱정이 되는 것은 아무래도 어쩔 수 없다.

오늘도 어디로 튕길지 모르는 탱탱볼처럼, 대형견에게 으르렁거리는 소형견처럼 거리를 활보하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며 또다시 새로운 전략을 구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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