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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구십칠 Jun 11. 2022

방 안의 코끼리 몰아내기

 신혼 초기에 내가 아내를 부르던 애칭 중 하나는 '열기'였다. 사람들은 보통 '열기'라고 하면 '열정에 기름붓기'를 떠올리는 데 사실 그런 뜻은 아니었다. 내가 불렀던 '열기'의 뜻은 '열두시는 기본'의 줄임말이었다.

 

아내는 슈퍼 외향형 유전자의 소유자로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여 늘 외출이 잦았다. 그리고 한번 친구들을 만나러 외출을 나가면 열두시를 훌쩍 넘은 시간에 귀가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사람 만나는 것을 노동의 영역으로 생각하는 나는 늘 일찍 귀가하였고, 열두시를 향해 부지런히 움직이는 초침과 분침을 노려보며 '오늘 기어코 귀가시간 최고 기록을 달성할 것인가' 생각하며 아내의 귀가를 기다리곤 했었다.


하루는 아내에게

"요즘 세상도 흉흉한데 귀가시간을 좀 앞당기거나 약속을 좀 줄이는 건 어떨까?"

라고 꽤 젠틀하게 권유도 해보았지만

"오빠. 나 결혼 전에는 퇴근하고 약속이 늘 세 개였어. 저녁 약속, 밤 약속, 새벽 약속!"

라는 아내의 말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래. 친구들 만날때 가장 행복한 사람이니까'하고 납득해버린 것이다.

 

이렇게 왕성한 그녀의 활동량에 제재를 건 것은 임신이라는 불가항력의 사건이었다. 아무리 활동적이고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아내라도 배가 불러올수록 활동에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아내의 임신 초중기는 코로나의 최절정기와 맞물려 있었다. 그 무엇보다 소중한 우리 아이를 위해 아내는 대부분의 업무를 재택근무로 처리하였고 가능한 외출을 자제하며 집 안에만 머무르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이제는 오히려 집에만 있는 아내가 안타까워졌다. 그렇게 서울 곳곳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어울리던 사람이 집 안에만 있으니 참 답답할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임신한 아내가 무리하게 활동하는 것은 분명 걱정이 되는 일이니까. 그렇게 문제를 애써 외면하며 모르는 척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아내의 활동 제약에 대한 문제는 나에겐 마치 방 안의 코끼리와도 같은 문제였다.


‘방 안의 코끼리’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애써 모른척하며 해결하지 않고 있는 상황을 말한다. 코끼리처럼 중대한 경제적 문제를 굳이 화두로 꺼냈다가 정치적으로 큰 후폭풍이 몰려올까 두려워 덮어두고 언급하길 꺼리는 상황에서 주로 쓰이는 표현이다.


아내의 평소 활동량과 임신 이후 집에만 있어야 하는 상황 사이에는 분명 괴리가 있었지만 마땅히 해결책도 없는 상황에서 굳이 이야기를 꺼냈다가 괜히 아내의 심기만 건드릴까봐 외면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며칠 동안 산책을 하지 못한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날 맞이해주는 아내를 보는 날이 길어 질수록 뭔가 그녀에게 도움이 될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일차적 대응 방법은 용병 활용이었다. 아내는 인복이 많은 사람이라 주변에 좋은 친구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집안에만 있느라 심심해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자 그녀의 친구들이 여기저기에서 동네까지 찾아와  것이다.

멀리 하남에서 서대문구까지 찾아  회사 친구, 일부러 회사에 반차를 내고 아내와 시간을 보내  친구도 있었다. 나도 그녀와 친구들의 만남을 적극적으로 장려하며 약속 장소까지 데려다주거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픽업을 가기도 하였다.

친구들과 동네에서 만나 하루 종일 수다를 떤 그날만큼은 만족스러운 산책을 끝낸 강아지처럼 집에 돌아오자마자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하지만 매일매일 용병에게 기댈 수만은 없으므로 강력하지만 완벽한 대응방법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또 다른 방법은 아주 단순한 해결책이었다. 퇴근 후 매일 아내와 산책을 나가는 것이었다. 퇴근을 하고 함께 저녁식사를 한 후엔 생활 계획표에 적어 놓은 일정처럼 늘 집 근처의 공원을 함께 걸었다. 짧게는 한 시간 길 때는 두세 시간가량의 코스였다.

산책 시간은 신체적 활동량을 채워주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그녀의 ‘일일 수다 총량’을 채워주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한참을 걸으며 아내는 하루 종일 겪은 일에 대해 끝없이 이야기했다. 오늘 하루 업무를 하며 힘들었던 지점에 대하여, 동네 맘카페에서 들었던 신기한 정보에 대하여, 오랜만에 엄마와 통화했던 내용에 대하여, 일하다가 심심해서 보았던 웹툰의 반전에 대하여. 그녀는 산책의 시간 동안 열정적으로 ‘수다 총량’을 채워 나갔다.


처음에는 그저 늘어져  푹 쉬고 내일 출근을 준비하고 싶다는 생각도 없진 않았지만 산책의 시간이 반복될수록 아내와의 대화에만 집중할 수 있는 그 시간을 나도 기다리게 되었다. 집에만 있었다면 자꾸 핸드폰을 보게 되거나 TV소리에 집중력이 흐트러져 아내와의 대화에 이만큼 집중할 수 없었을 것이다.

평소에는 말수가 없는 성격이지만 아내와 함께한 산책 시간에서만큼은 수다쟁이가 되어 아내를 웃게 하고 ‘오늘의 토크왕’이 되고자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 오늘 하루 회사에서 있었던 웃긴 사건에 대해 토크를 마치면 아내는 프로페셔널한 방청객처럼 물개박수를 치며 웃어주었다.

그저 방 안의 코끼리를 몰아 내기 위한 임시방편이었지만 아내와 함께한 매일의 산책 시간은 우리를 신혼 초보다 더 끈끈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시간이 흐른 후엔 우리가 가장 그리워할 그런 시간 중 하나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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