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배가 본격적으로 불러오던 시기, 나는 걱정 재벌답게 오만가지 걱정들을 떠올렸었다.
아내는 회사에서 배려해 준 덕분에 대부분 업무를 재택근무로 처리했지만 가끔 회사로 출근을 해야 하는 날이면 지하철 인파에 치이지 않을까, 자리에 앉아서 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산책길을 함께 걷다가도 씽씽 달리는 전동 퀵보드를 보면 혹시나 아내와 부딪히지 않을까 신경을 곤두세웠다. 내가 운전하는 차를 함께 타고 이동할 때도 작은 접촉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과속방지턱을 넘다가 배에 충격이 가지 않을까 하는 괜한 걱정 때문에 핸들을 잡은 두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가끔 식탁이나 싱크대에 배가 꾸욱 눌리는 모습을 보면 깜짝 놀라 손바닥으로 배와 모서리 사이를 막아설 때도 있었다.
걱정으로 바짝 예민해진 나와는 달리 정작 당사자인 아내는 ‘뭐가 그리 호들갑이야’ 하는 평온한 표정이었다. 임신 전의 컨디션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지 동그란 배를 내밀고 뒤뚱뒤뚱 거리를 활보했다. 회사로 출근을 한 날도 직장동료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어쩌면 집에 있을 때보다 더) 즐겁게 일과를 보내고 귀가했다. 아내는 회사 동료들의 관심과 보살핌이 매우 흡족했는지 늘 약한 흥분상태로 신나게 출근길에 나서곤 했다.
유일하게 달라진 부분이 있다면 입맛이었다. 이전에는 특별히 가리는 음식도,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도 없었던 아내가 일정 기간 동안 특정한 한 음식만 찾았던 것이다. 입맛이 통 없던 날들이 이어지다가 어느 날 문득 아내는 김치찌개 냄새에 격하게 반응했다. 결혼 전까지 찌개라고는 김치찌개와 된장찌개 밖에 끓일 줄 몰랐던 나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전부터 익숙하게 만들어 온 자취생 스타일 레시피대로 재료들을 몽땅 때려 넣고 끓인 김치찌개를 만들어 주자 아내는 냄비를 다 비울 때까지 김치찌개만으로 아침, 점심, 저녁을 해결했다.
김치찌개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진 또 다른 날에는 미역국이 먹고 싶다고 했다. 이전에도 아내의 생일 같은 이벤트가 있을 때 종종 ‘백종원 미역국 레시피’를 검색해가며 더듬더듬 미역국을 끓여 주곤 했는데 그때의 맛을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후다닥 소고기와 미역을 사다가 소고기 미역국을 끓여주자 이번에도 냄비를 다 비울 때까지 미역국으로만 식사를 했다. 이후에도 같은 패턴이 이어졌다. 한동안은 김치볶음밥에, 또 한동안은 청국장에만 입맛이 도는 식의 패턴이 이어졌기 때문에 아내가 그때그때 원하는 음식을 어설프더라도 빠르게 만들어다 주는 것이 나의 임무가 되었다.
가끔 집에서 만들 수 없는 음식을 찾기도 했다. 특별한 재료가 들어가거나 집에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요리들, 혹은 냉장고에 잘 두지 않는 과일들이었다. 아내가 처음으로 집밥이 아닌 다른 음식이 먹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을 때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내가 임신을 하고 나서부터 마음속으로 품고 있었던 하나의 로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칼바람이 부는 겨울밤 산딸기가 먹고 싶다는 임산부 아내를 위해 온 동네를 뒤져 겨우 딸기를 구해오는 남편의 스펙타클한 모험’ 같은 것.
이런 로망을 품게 된 데에는 구전의 영향이 크다. 예로부터 입덧을 하는 아내를 위해 음식을 구해온 남편들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고 있다. 새벽녘에 메론이 먹고 싶다는 아내를 위해 메론을 찾아 나섰지만 구할 길이 없어서 메론맛이 나는 과자, 빵, 아이스크림을 몽땅 구해다 주었다는 사연. 이미 마감한 순대 가게에 가서 임신한 아내가 찾는다고 주인장에게 읍소했더니 가게 문을 다시 열고 순대를 썰어 주었다는 사연. 올리브가 먹고 싶다는 아내를 위해 문을 연 마트를 찾아 백방으로 돌아다녀 보았지만 구할 길이 없어 올리브가 가장 많이 들어간 피자를 대신 사다 주었다는 이야기까지. 입덧하는 아내를 위한 남편들의 모험담은 참으로 흥미진진하다.
오래전부터 이런 이야기들을 동경해왔던 나는 ‘두고두고 우려먹으며 으스댈 수 있는 그런 모험이 나에게도 곧 찾아 오겠군’ 하고 내심 기대를 했던 것이다. 나중에 아이가 자랐을 때도, 누군가와 임신과 출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도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아쉽게도 로망의 순간은 허락되지 않았다. 간과하고 있었던 진실이 있었던 것이다. 요즘 세상은 굳이 직접 구하러 가지 않아도 클릭 몇 번으로 웬만한 음식은 문 앞에서 받아볼 수 있는 그런 시대라는 것.
이를테면 갑자기 타코가 먹고 싶다는 아내에게
“지하철역 가는 길에 멕시칸 집 새로 생겼던데 내가 후딱 가서 사 올까?” 하며 전의를 불태우며 이야기해도
“아니야 그냥 배민으로 주문할게” 하고 혼자서 간단하게 해결해버리는 시대인 것이다.
과일도 마찬가지였다. 늦은 밤 수박이 먹고 싶다는 아내의 이야기에 ‘드디어 출동할 시간이구나!’ 하며 24시간 마트로 가는 최단 코스와 편의점에서 수박을 팔 가능성을 떠올려 보았지만 이 역시 클릭 몇 번으로 30분 만에 배달이 완료되어 버렸다. 심지어 아주 먹기 좋게 손질까지 다 되어있는 상태로.
배달 앱을 처음 개발하신 분들은 배달 앱이 미치는 사회적 영향력과 달라질 사람들의 생활패턴을 치밀하게 예측하셨겠지만 배달 앱이 한 남편의 소소한 로망을 꺾어 버릴 줄을 아마 예측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이때의 좌절된 로망은 아내가 무사히 출산을 한 이후에도 자이가르닉 효과로 인해 마음 한구석에 여전히 깊이 남아 있다.
자이가르닉 효과는 완결된 일은 기억 속에서 쉽게 잊혀지지만 미완성된 일에 대해서는 오래 기억하며 쉽게 잊지 못하는 심리 현상을 말한다. 어린 시절에 이루지 못한 첫사랑에 대한 기억을 지긋한 나이가 되어서도 잊지 못하고 떠올리는 것 또한 자이가르닉 효과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또 다른 사람으로 잊는 것처럼 이루지 못한 로망은 또 다른 로망으로 잊는다. 이때의 로망은 이루지 못했지만 또 다른 로망들을 미리 준비 중이다. 아이가 조금 더 자랐을 때 함께 할 로망들을 미리미리 리스트업하고 있다. "엄마" 보다 "아빠!"라는 말 먼저 듣기, 영화 <로얄 테넌바움>의 벤 스틸러처럼 아이와 아디다스 져지 맞춰 입기, 전국 아쿠아리움 도장 깨기, 아내와 함께 갔던 여행지에 셋이 함께 방문하기... 어서 아이가 쑥쑥 자라 아빠의 소소한 로망들을 함께 실현시켜 주기를 고대한다.